‘박정희·박근혜’ 뒤에는 김기춘이 있었다
‘박정희·박근혜’ 뒤에는 김기춘이 있었다
  • 이주현 기자
  • 승인 2016.12.06 16: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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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현대사 굴곡의 역사 막후에서 진두지휘

[한국뉴스투데이] 야당은 최순실 국정농단과 헌법유린의 주범으로 김기춘(78)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목하고 있다. 국민의당은 ‘김기춘 헌정파괴 진상조사위원회’를 출범시켜 현재 조사 중이며 더불어민주당은 김기춘 구속수사를 연일 외치고 있는 실정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똘똘이라 부르던 김기춘은 여든을 앞둔 지금도 건재하다. 국정농단의 몸통으로 의심받는 김기춘은 현대사의 큰 사건들마다 막후에서 진두한 의심도 함께 받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배후 실체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김기춘의 현대사 굴곡 속으로 들어가 봤다. <편집자 주> 

▶유신헌법개정에 개입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우리의 정치체제를 개혁한다’며 초헌법적인 국가긴급권을 발동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적인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1972년 12월 27일 제 8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사진:박정희 대통령 전자도서관)

이어 헌법을 개정하고 11월 21일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91.9% 중 찬성 91.5%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박 전 대통령 취임일인 12월 27일에 공포·시행했다.

유신헌법은 형식적으로는 헌정사상 제7차 헌법 개정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구헌법을 폐지하고 새 헌법을 제정한 것이며 박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이었고 국민의 기본권 침해와 권력구조상에 있어 대통령 권한이 독재가 가능하게 된 헌법이었다.

이 유신헌법 개정은 박 전 대통령이 구상했으나 신직수 당시 법무부 장관과 김기춘 당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가 구체적인 안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일을 계기로 김기춘은 임용된 지 7년차인 평검사에서 법무부 과정을 거쳐 중앙정보부 부장의 법률보좌관으로 초고속 승진을 하게된다.

▶육영수 저격 사건 해결하다

1974년 8월 15일 서울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광복절 기념식이 열렸다. 박 전 대통령이 경축사를 읽는 도중 청중석에서 여러발의 총성이 울렸다. 박 전 대통령은 연설대 뒤로 몸을 피했으나 무대 위에 있던 육영수 여사가 총탄 중 한발을 맞고 쓰러졌다.

범인으로 지목당한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됐고 육영수 여사는 병원으로 옯겨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사망했다.

아직까지도 육영수 여사의 저격범이 문세광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당시 법률보좌관이었던 김기춘은 단 하루만에 문세광의 자백을 받아내며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으로 이례적인 승진을 거듭하게 된다.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재일교포 간첩단 사건)

1975년 11월 22일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인 김기춘은 “북의 지령에 따라 모국유학생으로 가장하여 국내에 잠입한 21명의 학원침투간첩단을 적발하여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했다”며 재일교포 유학생들을 간첩으로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서울대, 한신대, 부산대, 카톨릭대 등의 학생이던 김오자, 김철현, 김종태, 최연숙, 김명수, 김원중, 허경명, 이원이, 장영식, 강종건, 김동휘 등 수많은 재일동포유학생들이 검거되어 강도 높은 고문에 시달렸다.

이는 현재 당시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학생들에게 일침을 가한 대표적인 용공조작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간첩조작사건의 시발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근혜 뒤에는 7인회가 있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은 지난 11월 4일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광장’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최순실 사태로 위기에 놓인 박근혜 대통령을 김기춘 등 7인회 중 몇 명이 보좌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2013년 8월 13일 김기춘은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사진:청와대)

7인회란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대통령이 된 박근혜를 보좌한 7명의 정치인, 언론인으로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비롯해 강창희 전 국회의장, 현경대 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김용환 새누리당 상임고문, 최병렬 새누리당 상임고문, 김용갑 새누리당 상임고문, 안병훈 sbs문화재단이사장 겸 도서출판 기파랑 대표다.

박정희 정권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던 김기춘,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김용환 고문, 조선일보 정치부장이었던 최병렬, 조선일보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안병훈 등 박정희 정권에 깊숙이 개입한 이들은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이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정계에서는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정윤회 문건 유출 지시 의혹

현재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전인 지난 2014년 11월 28일, 세계일보가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내부 문건을 입수해 정윤회가 국정을 농단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당시 청와대는 보고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내용은 찌라시를 정리한 허위라며 세계일보를 고소했다.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하다가 2014년 초 경찰로 복귀한 박관천 경정이 이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박 경정은 유출 의혹을 전면 부인하며 청와대는 발칵 뒤집혔고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또한 문건 작성자 박관천의 상관이었던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문건의 내용 60% 이상이 사실이라고 발언해 정윤회 문건 유출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조응천은 이후 2015년 8월 1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부장판사 최창영)심리로 열린 재판에서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문건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자신의 교체설을 누가 퍼뜨리는지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려 이를 조사한 결과로 작성한 것”이라고 말해 김기춘이 문건 작성에 개입했음을 폭로했다. 이에 김기춘은 “사실 무근”이라며 조응천을 고소한 바 있다.

▶세월호도 최순실도 “나는 모른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당시 박 대통령의 7시간의 행적에 대한 의혹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그해 7월 국회 운영위원회의에 출석한 김기춘은 당시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박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대해 묻는 질문에 “당시 대통령의 위치에 대해 알지 못한다”며 “비서실장이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라고 대답해 파장을 가져왔다.

하지만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경호실장이 모르는 대통령의 스케줄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또한 김기춘은 11월 2일 박정희 전 대통령 100주년 기념사업 행사장에서 최순실과 관련해 보고 받은 일있냐는 질문에 “보고 받은 일 없고 알지 못합니다. 만난 일도 없습니다. 통화한 일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최순실에 대해 전면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어 최순실 국정농단 시국 수습에 관여하고 있다는 보도와 관련해 “제가 관여하는 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김종 전 문화체육부 제2차관이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통해 최순실을 알게 됐다”고 진술했고 최순실의 강남 건물에 김기춘이 수년간 살았던 사실 등이 속속 밝혀지며 김기춘의 말이 거짓임이 드러나고 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지난 11월 2일 최순실의 존재에 대해 아는 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사진:mbn뉴스)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은 김기춘을 향해 “법률 미꾸라지”라고 말하며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의 부두목”이라 지적했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교 교수는 “김기춘은 유신헌법 초안자, 중정 대공수사국장, 초원복국집 사건 주모자 등등 현대사 질곡의 핵심”이라고 평가했다.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는 자신의 저서 ‘역사와 책임’에서 “우리 사회가 유신 시대로 돌아간 것 아닌가하는 박근혜 정권 시기에 청와대 핵심 자리에는 ‘유신헌법의 설계자’로 알려진 김기춘이 앉아 있었다”며 “오늘날 가장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엘리트 집단의 중핵을 형성해온 사법 엘리트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가 김기춘”이라고 밝혔다.

이주현 기자 leejh@koreanews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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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2016-12-06 23:39:49
김기춘만 잘 조사해도 큰거 나올듯
근데 죽으면 죽었지 입 안열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