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장호 감독을 만나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장호 감독을 만나다
  • 곽은주 기자
  • 승인 2018.10.13 22: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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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구원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2018부산국제영화제 '영화의 전당'에서 이장호 감독 <사진=구경남 객원 기자>

아직 부산이다. 태풍 ‘콩레이’의 위협 속에 시작된 부산국제영화제는 이제 폐막식만 남겨 놓고 있다. 시간은 잘 흘러갔다. 지난 5일 <바람 불어 좋은 날>상영 후 영화의 전당에서 이장호 감독을 만났다. 쉽게 쓸 것 같았던 인터뷰 글은 좀처럼 써지지 않았다. 영화제에 초청된 감독의 영화들을 다 보고 나서야 비로소 감독의 속 깊은 말들이 살아났다. <별들의 고향>(1974),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어둠의 자식들>(1981), <과부춤>(1983), <바보 선언>(1983), <어우동>(1985),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 <시선>(2013) 등 연출작 20편중에서 8편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에 초청됐다. <시선>을 제외하곤 모두 70-80년대 영화들이다. 가난한 시대의 가난한 삶들이 눈물처럼 차올랐다. 그 여운이 깊고 길다.

 

2018부산국제영화제 핸드프린딩행사 이장호 감독 <사진=구경남 객원 기자>

고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천국으로 가셨다

영화제 시작 한 주 전에 이 감독의 95세 노모가 소천 하셨다. “모친이 치매를 앓았는데, 나만 알아 봤다. 치매 중에도 교회를 모시고 다녔는데 신기하게도 기도를 마치면 ‘아멘’을 하셨고 찬송가 부르는 시간에는 내용을 찾아서 읽으셨다. 사람을 기억 못 하면서도 사람을 보면 잘 웃으셨다.” 감독은 모친이 ‘웃는 치매’, 고은 치매에 걸렸다고 했다. 50일 동안 혼수상태로 잠자듯이 누워만 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을 마치고 생각해 보니 그 시간이 어머니에게는 악마와의 치열한 영적 전쟁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악마와 전투에서 승리하시고 구원 받으셨다는 확신이 왔다.” 모친의 소천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가까이 체험한 감독은 배우인 동생 이영호와 불자인 형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고 한다.

고은 치매. 그 말은 이 감독 자신을 빗대어 하는 말처럼 들렸다. 장로 임직을 받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화는 만들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서원했던 감독은 그 믿음의 고백처럼 영혼을 구원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과거 자신의 영화들이 ‘사망을 권하는 영화들’이라고 했다. 과거 영화들을 부정하는 이 감독을 보고 “기독교 영화를 만든다고 과거 영화들을 팽개치지 말라.”고 충고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감독은 단호하다. 그러나 어려운 길이다. 어려움 속에서 <시선>을 만들어 세상에 내 보냈으나 세상의 시선은 냉담했다. 충격이 컸다. 세상눈으로 보면 감독이 우매하게 보일 것이다.

2018부산국제영화제<한국영화 회고전의 밤> 행사 

이장호 감독, 이보희 배우 <사진=구경남 객원 기자>

차기작에 대해 물었다

“순탄치 않다.”고 한다. 우선 시나리오로 투지자의 관심을 끌어 야 하는 것이 큰 어려움이다.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고 준비하는 차기작이 일제강점기의 독일 선교사 서서평 이야기다. 시나리오 작업부터가 난항이다. “젊은 작가에게 시나리오를 맡겼는데, 방향을 잘못 잡아서 파기하고 다시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그동안 내가 만든 영화 인물들과 다르고 외국 여자가 척박한 조선 땅에 와서 선교사로 살았던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 어렵다. 서양인이라는 문화적인 거리감도 극복해야 되고...”

4년을 매달린 작품에 진전이 없던 차에 얼마 전 배우 신성일로부터 영화 의뢰가 들어왔다. 달콤한 유혹이다.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 그 중간에 낀 세대인 디지로그 세대 간의 갈등을 다룬 홈드라마다. 물론 기독교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이기심과 이타심을 축으로 사랑과 희생의 의미를 묻는 영화로 만들고 싶어서 시나리오 수정을 부탁했다. 수정된 것 봐서 결정하려고 한다.”

세상의 시선과는 다른 시선을 간구하는 감독은 <시선>이후 ‘고은 치매’에 빠져 침묵과도 같은 구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둠의 자식들>상영후 관객들과의 대화좌로부터 배창호 감독, 이장호 감독, 배우 김희라, 나영희 <사진=구경남 객원기자>

‘NG인생’이 새 사람을 입다

“대학 2학년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신상옥 감독을 만났다. 신필름에서 8년을 버텼다.” 초,중,고 동창이자 절친인 최인호 소설 <별들의 고향>으로 29세에 첫 영화를 만든다.

영화 <별들의 고향>은 대박이었다. 당시 한국영화 역대 흥행 기록 1위에 오른다. 서울관객 464,308명. 이후 <어제 내린 비>(1975), <너 또한 별이 되어>(1975),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1975) 등 1년에 3작품을 개봉한다.

“당시는 ‘외화수입쿼터제’가 있었던 때라 분기별로 한국영화를 1편 씩 만들어야 외화 1편을 수입 할 수 있던 시절이다.” 많은 제작자들은 외화로 돈을 벌기 위해 속전속결로 한국영화를 제작했고 그런 제작 환경에서 이 감독도 속사포로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던 중 1976년 연예인 대마초 사건으로 감독을 박탈당한다. “4년간 강제로 슬럼프에 빠졌다. <별들의 고향>(1974년)이 웃는 얼굴로 찾아 온 럭키 찬스라면, 4년간의 공백은 불행한 얼굴로 찾아 온 럭키 찬스였다.”고. “그 암울한 시간이 내겐 최고의 인생 전환점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복권되면서 리얼리즘 영화의 한 획을 그은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을 선보인다.

<바람 불어 좋은 날>과 <어둠의 자식들>(1981)은 해외반출불가 영화로 판정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에 쫓겨서 시나리오도 없고 제목도 없이 저항하듯 멋대로 찍은 <바보 선언>(1983)은 해외홍보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해외에 소개됐고 호평을 받았다. 아리송한 시대였다.

“시나리오 없이 찍은 필름을 극으로 연결하는 것이 큰 숙제였다. 고민 중에 우연히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책 읽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그래서 아들을 내레이션으로 썼고 아들의 그림들을 타이틀백으로 사용했다. 미래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SF영화”라며 싱겁게 웃는다. 이제 그 아들이 영화에 출연했던 감독의 나이보다 많은 40대가 됐다.

영화 인생 44년을 뒤돌아보면 여러 번의 슬럼프가 있었다. “내 영화 인생은 NG영화 인생이다. 그러나 NG영화 인생이 행운이었다.” 실패와 고통의 시간을 행운으로 만들어 가는 이 감독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옆 자리에서 <바보선언>을 같이 본 청년이 감독의 사인을 받아 들고 무척 기뻐했다. 사인에는 청년의 이름 아래 공들여 쓴 글씨로 ‘축복’이란 말이 적혀 있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울컥했다. 별안간 캄캄한 극장 안이 환하게 빛났다. <바보선언>에서처럼 이장호 감독은 죽고 없었다.

그곳에는 이방의 빛으로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는 언약의 새 사람 이장호가 있었다.

곽은주 기자 cineeun6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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