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여사 소천, 민주주의 동지 영면하다
이희호 여사 소천, 민주주의 동지 영면하다
  • 이주현 기자
  • 승인 2019.06.11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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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후 11시 37분…민주주의 산 증인 소천
DJ 정치적 동반자이자 여성운동가 ‘족적’ 남겨

문 대통령 “조금만 더 미뤄도 좋았을 텐데”
北 조문단 파견 가능성에 여론 이목 쏠려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지난 10일 오후 11시 37분 노환으로 소천했다. 사진은 지난 2017년 세계인권도시포럼에 참석해 인사하는 이희호 여사. (사진/뉴시스)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지난 10일 오후 11시 37분 노환으로 소천했다. 사진은 지난 2017년 세계인권도시포럼에 참석해 인사하는 이희호 여사. (사진/뉴시스)

[한국뉴스투데이]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지난 10일 오후 11시 37분 노환으로 소천(크리스천의 별세 지칭)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부인이기 전에 민주주의를 꽃피운 동지이자 남북 가교 역할을 한 인물로 우리나라 여성운동사의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이 여사의 소천에 정치권이 애도하고 있으며, 특히 북한이 조문단을 보낼지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영부인 이전 정치적 동반자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영부인’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한명의 ‘여성운동가’로 불리는 것이 옳다고 할 정도로 우리나라 여성운동사에 상당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이 여사는 지난 1922년 유복한 가정의 장녀로 태어났다. 세브란스의전(현재 연세세브란스병원)을 졸업한 부친 이용기씨의 남다른 교육열로 명문 이화여고와 서울 사범대를 졸업한 후 미국 유학을 했고, 귀국해서는 YWCA 총무로 사회활동을 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한 이 여사는 1851년 지인의 소개로 김 전 대통령을 만났고, 두 사람은 1962년 맺어졌다. 첫 부인과 사별한 김 전 대통령이 이 여사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이 여사의 집안에서는 반대가 거셌다고 한다. 국회의원 선거에 계속 낙선을 하면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고, 김 전 대통령에게는 전(前) 부인 사이에서 낳은 두 자녀(김홍일·김홍업 전 의원)가 있었기 때문이다.

YWCA와 여성계 선후배들이 만류했지만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을 선택했다. 훗날 이 여사는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운명은 문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곧 거세게 노크했다. 꿈이 큰 남자의 밑거름이 되자고 결심하고 선택한 결혼”이라고 기술했다.

여성운동가로 족적 남겨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부인 이전에 여성운동가이자 인권운동가로도 활동을 해왔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등을 맡았고, 각종 여성 단체에서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가족법 개정 운동, 축첩 정치인 반대 운동, 혼인신고 의무화 등 사회운동에도 헌신했다. (사진/뉴시스)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부인 이전에 여성운동가이자 인권운동가로도 활동을 해왔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등을 맡았고, 각종 여성 단체에서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가족법 개정 운동, 축첩 정치인 반대 운동, 혼인신고 의무화 등 사회운동에도 헌신했다. (사진/뉴시스)

결혼 이듬해 막내 홍걸씨(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가 태어났고, 김 전 대통령

은 정치인으로 성장하면서 1971년 신민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하지만 박정의 전 대통령과의 대선에서 패배한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부로부터 상당한 탄압을 받았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상당히 유명한 사건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0‧26 사건으로 인해 사망한 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가 출현하면서 사형 선고를 언도받았고,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이 여사는 당시에 대해 “외롭고도 잊혀진 곳에 있었던 세월”로 기억했다.

김 전 대통령이 1997년 대선에 당선되면서 영부인이 됐다. 이 여사는 매일 아침 조간신문을 확인해 김 전 대통령에게 조언할 정도로 정치적 동반자 역할을 했다.

또한 여성운동가이자 인권운동가로도 활동을 해왔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등을 맡았고, 각종 여성 단체에서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가족법 개정 운동, 축첩 정치인 반대 운동, 혼인신고 의무화 등 사회운동에도 헌신했다.

지난해 미투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 여사는 “더 단호하고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고 피해자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장례위원장은 장상·권노갑

이 여사의 장례를 주관할 장례위원장은 장상 전 국무총리서리와 권노갑 고문이 맡기로 했다.

아울러 장례위원회 고문으로 5당 대표가 참여하는 방안이 타진 중이며 장례위원으로 참여하고 싶은 의원들은 참여할 수 있게 했다. 현재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계획을 세웠다.

이런 가운데 북유럽 순방 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SNS 글을 통해 “오늘 이희호 여사님께서 김대중 대통령님을 만나러 가셨다”면서 소천을 알렸다. 그러면서 “여사님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민주주의자”라고 추모했다.

문 대통령은 “조금만 더 미뤄도 좋았을 텐데, 그리움이 깊으셨나 보다”며 “평생 동지로 살아오신 두 분 사이의 그리움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르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 여사를 향해서는 “여사님 저는 지금 헬싱키에 있다”며 “부디 영면하시고, 계신 분들께서 정성을 다해 모셔주시기 바란다”고 전했다.

北 조문단 방문할까?

이번 장례에 있어 관심이 가는 대목은 ‘북한’이다. 북한이 조문단을 보내올 것인지 세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북한은 지난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때에도 다음날 김정일 국방위원장 명의의 조전을 보내고, 특사 조의방문단을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사흘 후인 8월 21일 김기남 당시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으로 구성된 특사 조의방문단이 특별기로 서울에 도착했다.

따라서 이번에도 과연 북한이 조문단을 보낼 것인지에 대해 상당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번 조문단 방문에 관심이 가는 이유는 경색된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김영철 전 통일부장 후임 장금철 통전부장이 조문단으로 오게 된다면 남북관계의 새로운 문이 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여사가 북한 문제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면서 지난 2015년 평양을 방문했다. 그만큼 남북관계의 평화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이 여사의 소천으로 인해 정국이 조문 정국으로 바뀌고 있다. 이는 경색된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경색된 국회도 풀리게 할 것인지 관심이 집중된다.

6월 임시국회가 제대로 열리지 못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 여사의 장례는 여야 당 대표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주현 기자 leejh@koreanews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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