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인터뷰】 작곡가 겸 지휘자 최재혁
【스페셜인터뷰】 작곡가 겸 지휘자 최재혁
  • 김희영 기자
  • 승인 2019.06.20 1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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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름다움을 향한 손끝
메인사진 작곡가 겸 지휘자 최재혁
작곡가 겸 지휘자 최재혁

꿈꾸는 듯한 묘한 눈매와 호기심 가득한 미소는 여전하다. 뚜렷한 소신과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도 남다른 그는 내셔널리즘보다 인터내셔널리즘을 지향하는 스타일까지 변한 게 없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더욱 깊어진 음악적 농도뿐이었다.

1년 전 스위스 제네바콩쿠르 입상 직후 진행한 인터뷰에서는 확실히 어리고 당찬 소년 같았다. 2년이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경험을 한 그이지만, 이제는 제법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줄곧 유럽 무대에 오르며 일 년에 한국에 있는 날이 한 달도 채 안 되는 최재혁.

따스한 햇볕으로 가득한 5월 초, 서래마을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두 시간 남짓 나눈 대화는 줄곧 건강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에게서 나이에 맞지 않는 성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2017년 스위스 제네바콩쿠르 작곡부문 우승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더니, 20189,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세계적인 지휘자 사이먼 래틀, 던칸와드와 나란히 포디움에 올라 다시 한 번 클래식 음악계를 흔들었다. 제네바 우승 소식 이후 10개월 만에 이루어낸 쾌거였다. 그리고 20194, 부천필 해설음악회를 통해 국내 데뷔 무대 또한 성공적으로 치렀다. 한 번의 성공은 운일 수 있지만, 두 번의 성공은 운을 뛰어넘는 실력을 증명한다. 이제 그는 오는 6월 디퍼런트 디토 공연으로 세 번의 성공을 앞두고 있다. 지금부터 지난 2년 동안 소중한 순간을 더듬으며 기회를 잡은 음악가 최재혁의 시각을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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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 위에 한음 한음 기적을 써 내려간 작곡가 최재혁

지난 44, 부천필 해설음악회 포디움에 서 있던 재혁 군을 기억해요. 당찬 모습은 여전하더군요. 사실상 첫 국내 지휘 데뷔 무대였기에 좀 더 특별한 작품을 하고 싶었을 텐데, 선곡이 좀 의아했죠. 주특기인 현대음악으로 승부를 볼 것 같았는데.

처음에 부천필 사무국의 연락을 받았을 때 가장 기뻤던 건 지휘자가 레퍼토리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매번 현대음악만 하다가 이제 진짜 정통 낭만 음악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설레었죠. ‘클래식 음악! 문학에 취하다부제에 맞는 다양한 작품을 고민하고 후보작품을 말씀드렸더니 이미 부천필 무대에 올린 적이 있었고, 어떤 작품은 객원을 불러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더라고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했을 때 최대한 겹치지 않는 레퍼토리에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던 중 괴테를 떠올렸죠. 그래서 구노의 파우스트 왈츠를 시작으로 바그너의 파우스트 서곡 작품 59’,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의 겁벌작품111 헝가리 행진곡 요정의 춤’, 리스트 르노의 파우스트 2개의 이야기 작품110 중 제2메피스토 왈츠’, 그리고 피날레 작품으로 리스트의 교향시 제2타소: 비탄과 승리작품96으로 레퍼토리를 구성했습니다.

주로 현대음악을 지휘했던 터라 정통 클래식으로 데뷔 무대를 소화하기엔 부담감이 있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재혁 군의 나이가 어려서 염려되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외국 오케스트라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좀 더 편안하게 하는 편인데, 한국 오케스트라 분위기는 어떨지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협연을 해 본 친구들에게 살짝 물어봤어요. 첫날은 어색했던 게 사실입니다. 첫 리허설 때 서로 극존칭을 쓰면서 어려워했는데, 한두 번 만나니까 단원분들 모두 편안하게 대해주시고 챙겨주시더라고요. 얼었던 분위기가 금세 녹아버렸죠. 특히 저에게 조카 같고, 아들 같다고 하시면서 먼저 다가와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연습하면서 해프닝은 없었나요?

해프닝이라기보단 단원분 중에 제가 작곡가 최재혁과 동명이인인 줄 알았다고 놀라워하신 분이 있었어요. 부천필 해설음악회 포디엄에 서는 지휘자 최재혁이 제네바 우승자 최재혁인 줄 몰랐다며 반가워하시는 분도 계셨고요. 아마도 제가 지휘자로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웃음)

무엇보다 전곡을 암보해서 연주했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암보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나 궁금하기도 했고요.

거의 다 춤곡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관객들이 좀 더 쉽게 즐겨주셨어요. 게다가 전원경 선생님의 해설 덕분에 작품 모두가 쉽고 재밌게 다가왔다는 리뷰를 남겨주신 분이 많았죠. 그리고 암보는 음... 뭐랄까요? 악보는 계속 보면대에 있었어요. 사실 제가 예전에 포디엄에서 악보를 두 장 넘기는 실수한 적이 있거든요. 다행히 쉼표가 많은 부분이어서 청중도 단원도 눈치채지 못한 상황에서 재빨리 자리를 찾아서 정말 다행이었죠. 그때의 기억 때문에 악보를 보면서 넘기는 게 조심스럽더라고요. 이번 부천필 공연은 제가 많이 공부하면서 준비를 했고, 단원 분들과 함께하다 보니 선율을 자연스럽게 따라간 거였어요. 이미 리허설을 했기 때문에 연주자들과의 호흡도 익숙해졌고요. 그리고 이번 공연은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스스럼없이 보여줄 수 있는 무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암보했던 거죠. 악보만 보는 것보다 단원들의 눈을 보는 게 훨씬 더 음악이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잖아요. , 그리고 악보를 넘길 여유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고요.(웃음)

지난 2019년 4월, 부천필과의 연주를 통해 국내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지난 2019년 4월, 부천필과의 연주를 통해 국내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정식으로 지휘를 배우지 않아서 더 좋은 기회를 만났다는 스트라드 4월 호 인터뷰를 보면서 작곡가 슈만이 떠올랐어요. 손가락 부상으로 인해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하고 작곡으로 몰두하면서 더욱더 창의적으로 쓸 수밖에 없었던 슈만이요. 물론 맥락은 다르지만, 재혁 군이 생각나더라고요. 지휘를 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시작한 것에 대해 느끼는 점이 많을 것 같아요.

지휘의 기본은 비팅이잖아요. 정확하게 단원들에게 템포를 흔들림 없이 주는 것이죠.

제가 처음에 지휘를 배운 건 2013년에 현대음악의 거장 외트뵈시 선생님이 진행하는 현대음악 마스터클래스에 초대된 날이었어요. 그때 모차르트나 베토벤을 배워야 하는 레벨인데, 슈톡하우젠부터 시작했죠. 현대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확한 비팅과 투명한 사인입니다. 저 역시 현대음악에 가장 중요한 해석은 투명도라고 생각하고요. 단원들이랑 소통이 완벽해야 정확한 화성이 나올 테니 말이죠. 단원에게 비트를 정확하게 주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해석이 시작된다고 보는데, 저는 오히려 현대음악을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기본기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는 모든 곡에 대해서 어떻게 해보자라고 하시기보다는 이것만 강조하시더라고요. 지휘는 수많은 음표들이 지나가는 그 찰나의 순간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것. 그것이 지휘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72회 스위스 제네바 국제콩쿠르 작곡부문 역대 최연소 우승을 수상한 최재혁(2017)
제 72회 스위스 제네바 국제콩쿠르 작곡부문 역대 최연소 우승을 수상한 최재혁(2017)

제네바콩쿠르 우승 이후 1년이 지났습니다. 작년 메뉴인콩쿠르에서 ‘Self in mind’ 파이널리스트 6명이 동시에 작품을 연주하는 건 굉장히 새로운 경험일 것 같아요. 우승한 친구들을 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을 것도 같고요.

보통 세계 초연을 할 때에는 작곡가랑 연주자랑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이 부분은 이런 해석이 어때?”라면서 서로 주문하고 조율하죠. 아무래도 첫 연주를 앞두고 있을 때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굉장히 신경 쓰거든요. 요즘은 시대가 좋아서 SNS를 통해서도 실시간으로 퍼질 수 있으니 처음부터 잘 해두어야 본보기가 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연주자들이랑 소통하는 게 중요한데, 메뉴인콩쿠르는 아무래도 콩쿠르다 보니 이 점이 가장 어려웠어요. 더군다나 주최 측에서 저랑 참여자들 사이의 연락을 아예 못하게 했고요. 그래서 직접 만날 수는 없어도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게 허용해 달라고 부탁드렸죠. 물론 참가자 여러 명에게 많은 질문들이 왔는데, 정말 신기했던 건 파이널리스트에 올라온 6명한테는 연락이 한 명도 안 왔어요.(웃음) 어떠한 커뮤니케이션 없이 오로지 그날 경연장에서 보게 된 친구들이었죠. 저도 그날 연주자들의 무대를 처음 본 거였고요. 이번 콩쿠르에서 1등 한 두 명이 제가 이렇게 소리를 내줬으면 좋겠다’, ‘이런 분위기였으면 좋겠다라고 바랐던 대로 소리를 내줘서 너무 놀라웠어요. ‘어떻게 10, 11살 친구들에게 이런 음악적 감수성이 있을까?’ 하며 너무 감사했죠.

제네바 콩쿠르 우승 이후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일단은 작곡하는 데 좀 더 자신감이 붙었어요. 선생님이랑 레슨하며 악보를 볼 때 이 부분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조언해 주시잖아요. 보통 두세 개 정도 말씀해 주시면 생각해 보겠다고 해놓고 안 고친 게 많아요.(웃음) 예전에는 그냥 무턱대고 밀고 나갔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저의 작품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아요. 저의 곡이니까 제 느낌에 집중하는 거죠.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사람들이 저의 곡을 듣고 연주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에서 문의가 올 때면 참 감사하죠. 악보는 어디서 살 수 있는지부터 유튜브에 업로드된 곡을 접하고 이메일 주소를 물어보는 댓글도 많고요. 작곡가의 작품에 관심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정말로 영광입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

지휘의 기본은 수많은 음표들이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을 정확히 짚어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대한민국 출신 음악가 최재혁
지휘의 기본은 수많은 음표들이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을 정확히 짚어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대한민국 출신 음악가 최재혁

지난 9,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슈톡하우젠의 그루펜을 연주했던 건 정말 놀라운 쾌거입니다. ‘운도 실력이 있어야 따라준다는 말을 재혁 군을 보면서 느꼈습니다. 지휘자 마티아스 핀처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인해 재혁 군이 포디움에 올랐습니다.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네요.

사실 해프닝이 좀 있었어요.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그루펜이라는 곡을 선보일 예정이었고, 아카데미 측에서 Conducting Fellows의 학생들 세 명을 초대해 주신 거였어요. 그렇게 저와, 독일인 친구, 이스라엘 친구 이렇게 세 명이 선택된 거예요. 그러니까 저희 셋은 그루펜 공연을 하는 게 아니라 보조 지휘자들이었던 거죠. 1번 오케스트라의 수장은 마티아스 핀처, 2번은 사이먼 래틀, 3번은 던칸 와드였어요. 쉽게 말해서 지휘자가 몇 번 오케스트라의 어느 세션의 리허설이 더 필요하다고 하면 Conducting Fellows의 보조 지휘자들이 리허설을 통해 연주자들과 같이 맞춰 보며 일련의 과정을 배우는 거죠. 그래서 저희 셋은 처음에 연락을 받고 너무 감사했죠. 이제 루체른에 가는 기차 안에서 주최 측에서 누가 어느 오케스트라를 보조하고 싶은지 정하라고 했어요. 아마 당시 저희 셋 모두 사이먼 래틀을 보조하고 싶었을 거예요.

결과는 어땠나요?

세 명 모두 래틀과 하고 싶어서 약간 눈치싸움이 있었어요, 하하. 저희 셋 모두 우물쭈물하고 있던 사이에 이스라엘 친구가 먼저 사이먼 래틀이랑 하고 싶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자연스레 제가 1번 마티아스 핀처 선생님의 보조 지휘자가 되었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친구와 독일 친구가 각각 2번 사이먼 래틀, 3번 던칸 와드의 보조 지휘자가 되었고요. 사실 저는 핀처는 저의 선생님이시니 그때만큼은 다른 지휘자님께 배워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욕심을 내려놓고 여기에 온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임했습니다. 교수님께서 어떤 과제를 내 주실 줄 모르니 묵묵히 준비했고요. 그렇게 그루펜 리허설 시작날인 96일부터 각자 준비하는 데 돌입했죠.

그 당시 정말 감사했던 게, 보조 지휘자들이 10분 정도는 오케스트라 포디엄에 설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죠. 제 담당은 오케스트라 1이었고요. 그러던 중 95일 저녁 리허설 가는 버스 안에서 갑자기 핀처 선생님이 하차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거죠.

주최 측에서 상당히 당황스러웠을 것 같아요.

맞아요. 저희도 당황했죠. 도착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리허설을 시작도 못하고 분위기가 굉장히 어수선했어요. 갑자기 사임했다는 핀처의 소식에 충격이 컸죠. 주최 측에서 급하게 대타 지휘자를 모셨더라고요. 10년 전 아카데미에 참여했던 중국 여성분이었는데 이곡을 연주해본 경험이 있는 분이셨어요. 그런데 리허설을 하면서도 템포를 저에게 물어보시더라고요. 아무래도 제가 계속 옆에 있었고, 너무 오랜만에 하는 작품이어서 그러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그분께 제가 아는 선에서 모두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그리고 그때 마침 사이먼 래틀이 2번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끝내고 저희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보러 오셨는데, 약간 눈빛이 불안해 보이셨어요. 몇 분 후 긴급하게 회의가 소집되더라고요. 주최 측 관계자는 저한테 잠시 의논할 게 있다며 집에 가지 말라고 했고요. 30분 후 래틀이 저를 호출했다며 방으로 잠시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들어갔더니 그 큰방에 홀로 사이먼 래틀이 계셨어요.

그 공기의 긴장감이 여기까지 전해집니다. 당시 사이먼 래틀과 어떤 대화가 오고 갔나요?

저에게 딱 한 마디로 물어보셨어요. “나도 이런 상황이 싫고 다시 번복하는 게 싫지만 네가 준비를 많이 했으니 네가 하는 게 좋겠다.”라고 하셨죠. 당장 공연까지 3일밖에 안 남았는데, 할 수 있겠냐(can you do it?)고 물어보셨어요. 전 너무 떨렸지만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했죠.

“I will do it good”라고 말이죠. 그랬더니 “OK!”하시며 한번 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대답을 던지니까 표정이 풀리더라고요. 그날부터 저는 밤새도록 공부했어요. 운이 상당히 좋았죠. 제가 만약 2번 사이먼 래틀이나 3번 던칸 와드 선생님의 보조 지휘자였다면, 저는 이 무대에 설 수 없었을 테니까요.

루체른페스티벌에서 지휘하고 있는 모습(2018)
루체른페스티벌에서 지휘하고 있는 모습(2018)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오는 것이라는 말은 재혁 군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네요. 이번 무대를 통해 느꼈던 점이 많았을 것 같아요.

정말 제 생애 최고의 경험이었어요. 결정된 이후 저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준비했죠. 세 개의 오케스트라 약 200여 명의 단원들과 함께하는 공연이기에 엄청난 책임감과 집중을 요하는 자리였어요. 제가 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해내야만 했고요. 지금도 그 포디엄에 서 있던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그 다음 날인 97일에 첫 리허설도 무사히 잘 끝냈고, 공연 당일에 두 번의 공연도 무사히 끝낼 수 있었어요.

한 무대에 세 개의 오케스트라가 오른다? 그것도 지휘자 세 명이 동시에 연주해야 하는 규모가 큰 음악회잖아요. 굉장히 떨리고 복잡할 것 같았는데, 잘 해냈군요.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너무 떨리고 기쁩니다. 리허설 때 실수해도 분위기가 정말 좋았어요. 래틀이 워낙 대가인지라 아카데미 학생들도 잔뜩 긴장했었는데, 너무 편안하게 이끌어주시고 농담도 건네시니까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지더라고요. 한 가지 아쉬웠던 건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시선을 많이 마주칠 수 없었다는 점? 오케스트라는 소통을 해야 음악이 더 부드럽게 만들어지는데, 제가 단원들만 계속 쳐다보면 지휘자 셋이서 싱크가 안 맞는 거예요. 한 명은 정박으로 가고있으면서도 저는 그 안에서 셋잇단음표로 세분화해서 가야 하는 비팅도 있었고, 정말 복잡했어요. 저의 소리를 챙기면서 다른 두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비팅과 소리도 함께 집중해야 하니까요. 그렇기에 더욱 지휘자들을 보면서 함께 믿음으로 혼신을 다했어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너무 재밌고 잊지못할 경험이었습니다.

똑같은 곡으로 하루에 두 번했다고 하던데, 주최 측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공연을 저녁 6, 930분에 두 번 했어요. 티켓이 조금 독특했는데, 예를 들어 좌석이 지정되어있는 티켓을 뒤집으면 또 다른 좌석이 지정되는 거였어요. 다시 말해 앞장에 A블록 1열이면 뒷장에는 E블록 1열이 인쇄되어있는 거죠. 음악을 어느 위치에서 듣느냐에 따라서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을 이용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현대음악이기 때문에 한 번 들으면 저게 뭐지?’라는 부분이 두 번 들으면 조금 알 것 같다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렇게 관객의 관점에서 기획한 공연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죠.

루체른페스티벌에서 공연이 끝난 후 청중에게 인사하는 모습(왼쪽부터 던칸 와드, 최재혁, 사이먼래틀,2018)
루체른페스티벌에서 공연이 끝난 후 청중에게 인사하는 모습(왼쪽부터 던칸 와드, 최재혁, 사이먼래틀,2018)

마지막에 세 분 모두 피날레 인사를 하는 사진이 너무 멋졌어요. 근데 이 사진에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다고 하던데요?

커튼콜 할 때 주최측에서 맥주와 와인을 준비해주셨어요. 원래 사이먼 래틀 선생님은 공연 끝나고 맥주를 마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먼저 맥주를 드는 바람에 네가 맥주를 들면 어떡하냐라고 말해서 다 같이 웃게 되었어요. 사진은 그 찰나를 찍은 겁니다. 제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웃음)

새로운 챕터를 쓰며 세계로 뻗어나가는 최재혁

그는 20대 여느 또래들처럼 평범한 취미를 갖고 있다.
그는 20대 여느 또래들처럼 평범한 취미를 갖고 있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군요. 이번 한국 일정은 평소보다 꽤 깁니다. 약 한 달여 동안 하고 싶었던 게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평소 어떤 취미를 가졌는지도 궁금하고요.

다음 연주를 준비하고 구상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워낙 미술관 가는 걸 좋아해서 자주 다니고 있고요. 제 또래 사람들이랑 대화하면서 음악 이야기, 인생 이야기하며 술 마시는 것도 좋아해요. 어릴 땐 굉장히 개구쟁이였던 것 같은데, 작곡을 시작하게 되면서 많이 차분해진 것 같아요. 한국에 있는 동안 일정이 허락된다면 번지점프도 하고 싶어요. 시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오는 6월 28일에 진행될 크레디아 주최 '디퍼런트 디토' 공연 포스터
오는 6월 28일에 진행될 크레디아 주최 '디퍼런트 디토' 공연 포스터

오는 628, 예술의전당 IBK홀에서 열리는 디토 페스티벌 디퍼런스 디토공연을 앞두고 있습니다. 작품이 세상앞에 나올날이 머지않았군요.

이 작품은 세계최고 현대음악 전문 연주단체인 앙상블 앙탱콩탱포랭의 초연을 위해 쓴 곡이에요. 위촉된 건 아니지만, 저의 곡이 뽑혀서 이 단체의 초연으로 결정되었죠. 파리 퐁피두센터 옆에 현대음악센터 IRCAM(이르캄)이 있는데, 이 곳은 현대음악과 전자음악 연구소 같은 곳입니다. 삐에르 블레즈가 이 연구소를 만들면서 앙상블 앙탱콩탱포랭이라는 연주 단체를 만들었죠. 현대음악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연주 단체 혹은 교육기관이기도 한 이곳에서 작년에 20여 명의 작곡가를 초청했어요. 스케치한 걸 가지고서요. 그렇게 저도 마스터클래스를 하러 갔었고 그곳에서 2주 동안 단원들과 지휘자들과 곡을 포함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교류했어요. 그리고 연주자들과 지휘자들이 2~4곡을 고릅니다. 그런데 뽑힌 곡 중의 한 곡이 저의 곡이어서 이번에 그 작품을 하는 거예요. 이 역시 감사한 경험이죠.

‘Dust of Light’의 자세한 작품 설명 부탁드려요.

뉴욕의 거리를 거닐다가 수없이 많은 갤러리들을 만났어요. 그곳에 걸린 작품들을 작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아니 궁금해하지도 않은 채 감상했죠. 저마다 다른 미학관들이 깃들여져 있고, 저마다 다른 리듬으로 화폭안의 색채가 현란하게, 또는 우아하게 춤을 추기도 하잖아요. 그렇게 저는 뉴욕의 거리에서 다양한 작품들을 만났고 다양한 미학적 이상을 마주하게 되었죠. ‘Dust of Light’는 빛의 파편, 또든 빛의 먼지 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곡은 기존의 저에게 절대적 아름다움이었던 미학관과 작별을 고함과 함께 다른 소리에 대한 탐구의 여정이 시작된 녹턴 시리즈와 셀프 인 마인드 시리즈의 친구로 탄생하게 된 곡입니다. 셀프 인 마인드 12, 그리고 3번의 성격을 모두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4번으로 불러야하나 고민했지만, 셀프 인 마인드는 독주 연작이니까요. 이 곡은 앙상블 곡이므로 다른 이름을 주었고, 그 이름은 곡이 담고있는 소리들을 상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제게 계속해서 묻는거죠. 아름다움은 무엇이냐고.

그래서인지 더욱 기대됩니다. 우연의 일치로 보기엔 너무나 운명적인데요. 현대음악의 심장부인 파리에서의 초연과 국내 초연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앙상블 앙탕콩텡포랭의 세계 초연 일정이 겹쳐서 참석하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동시에 두 나라에서 울려 퍼지다니 실로 놀랍습니다!

파리 초연이 한국 시간보단 느리지만 세계 초연이자 국내 초연이 같은날 이루어진다니 저도 놀랍고 감사해요. 현대음악은 비팅이 투명한 해석이 첫 번째인데, 세계 최고의 현대음악 단체인 앙탕콩탱포렝은 이미 비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합니다. 마티아스 핀처가 음악감독으로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고요. 28일 연주는 전 앙상블엥텡콩탕포랑의 부지휘자인 Julien Leroy 가 맡습니다. 한국에서는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저의 작품을 연주하시고요. 그래서 6월에 다시 귀국해서 한국에 있는 동안 최대한 연주자들과 자주 만나서 리허설도 하고 음악적으로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다 하고 갈거에요. 국내 연주의 날짜가 달랐으면 제가 직접 지휘하고 싶었는데, 우연히 날짜가 겹쳐서 좀 아쉽지만, 분명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음악감독으로 있는 앙상블 블랭크의 연주회가 오는 6월 22일에 진행된다.
그가 음악감독으로 있는 앙상블 블랭크의 연주회가 오는 6월 22일에 진행된다.

또래의 음악가들과 함께 앙상블블랭크 활동을 하는 것도 돋보입니다. 많은 분들이 622일 공연에 관심을 보내고 있어요. 재혁 군도 총 프로젝트의 음악감독으로서 하나부터 열까지 기획한 공연이기에 더욱 애정이 생길 것 같고요.

앙상블블랭크는 저희끼리 재미있게 음악하고 싶어서 만든 단체에요. “우리는 이런 곡을 만들면서 즐기고 있는데, 너도 같이 할래?”라고 제안하면서 지금의 멤버들을 만났어요. 그중에서 지인을 통해 추천받은 멤버도 있고, 실력은 물론 저희와 조합이 잘 될 것 같은 사람도 섭외했죠. 그렇게 모인 앙상블블랭크는 최대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을 추구합니다. 일반 클래식한 홀보다는 창고 같은 곳이나 편안한 곳에서 하고 싶은 소망이 있어요. 완전히 파격적인 콘셉트를 지향한다고 해야 할까요? 내년에는 공장에서 공연할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올해는 강남역 부티크 모나코라운지에서 공연을 합니다! 90분 동안 진행되는 독창적이고 신선한 음악회를 맛보고 싶은 분들을 모두 와 주세요!

부다페스트 외트뵈시 재단 마스터클래스에 참여한 모습(2019)
부다페스트 외트뵈시 재단 마스터클래스에 참여한 모습(2019)

2시간 내내 자신의 소신을 당차게 털어놓은 스물다섯 살 청년. 그에게 작곡과 지휘 중 어느 것이 좋으냐는 굉장히 상투적인 질문을 던졌다. 한참 대답을 망설이더니 나오는 한마디.

... 둘 다 좋죠, 당연히. 확실한 건 지휘는 음악가들과 소통하며 같이 음악을 다듬어가는 즐거움이 있고, 작곡은 온전히 제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즐거움이 있어요. 많은 분들이 지휘를 하기 위해 작곡을 했다고 생각하시는 데, 그건 아닙니다. 지휘를 할 때 느끼는 성취감과 작곡을 할 때의 성취감은 다르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둘 중에 무엇이 더 좋다기보다는 서로 다른 매력이 있기 때문에 제가 지금 준비하고 활동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끝으로 그에게 어떤 사람으로 불리길 바라는지 물었다. 한동안 고심하던 그는 조심스레 대답을 털어놓았다.

저는 작곡가 겸 지휘자도 좋지만 항상 예술가가 되고 싶어요. 화가들은 화백, 예술가라고 불리는데, 왜 음악가는 예술가라고 불리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흔히 아티스트라고 하면 조금 상업적인 냄새가 나는데, 예술가는 굉장히 순수한 냄새가 나잖아요. 그래서 저는 저를 음악가라고 소개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사람들에게 음악하는 예술가로 남고 싶어요.”

지난 5월 스위스 제네바 빅토리아홀에서 지휘와 동시에 작품을 초연했다.(2019)
지난 5월 스위스 제네바 빅토리아홀에서 지휘와 동시에 작품을 초연했다.(2019)

한참 재혁군과의 인터뷰를 정리하던 중 지난 512일 오후 5시 스위스 제네바 빅토리아홀에서 열린 제네바콩쿠르 우승자 기념 공연에서 작품 발표와 지휘 무대를 모두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번 공연은 제네바콩쿠르 측에서 최재혁(2017 작곡 부문 우승), 김유빈(2014 플루트 부문 1위 없는 2) 외 역대 수상자 13명을 초대해 마련했다. 이날 최재혁은 작품발표와 지휘뿐만이 아니라 음악감독 역할까지 수행했다. 프로그램 선정을 비롯해 공연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을 최재혁 본인이 직접 조율한 셈.

“‘Self In Mind 는 초상화를 그리듯 소리를 통해 독주 악기의 매력을 풀어낸 작곡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이날은 한국에서 신예 플루티스트로 떠오르고 있는 김유빈 씨가 연주를 선보여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젊은 음악인 두 명이 이룬 쾌거는 실로 말할 수 없을 만큼 벅차다. 스티브 라이히의 ‘Eight Lines’를 직접 지휘한 최재혁 군. ‘Eight Lines’는 총 5개 세션으로 이루어진 16분 내외의 짧은 작품이지만, 지속음, 당김음, 오스티나토 등을 구사하여 악기 간의 조화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그 매력을 함축해서 당당히 세상 앞에 내놓은 젊은 음악가 최재혁. 다소 어린 나이가 무색한 그의 원숙한 고민은 자신만의 음악적 영역을 더욱더 폭넓고 단단하게 채워가고 있다.

최재혁은 월간리뷰 2019년 6월호 커버스토리 모델로 선정되었다.
최재혁은 월간리뷰 2019년 6월호 커버스토리 모델로 선정되었다.

불과 2년 전인 2017년 스위스 제네바콩쿠르 작곡 부문 우승으로 세상을 들썩이게 했던 젊은 작곡가는 이제 손끝으로 음악을 표현한다. 손끝으로 그려낸 음악은 세계를 향해 확장되고, 그 파동은 무한함을 증명해 내고 있다. 그는 세상에 소리치며 조금씩 거장의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매일 새로운 목표들로 챕터를 써나가는 예술가 최재혁. 그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자료 및 사진제공 월간리뷰)

김희영 기자 dud05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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