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칼라스: 세기의 디바 (원제: Maria by Callas: In Her Own Words) 신화는 계속 된다
마리아 칼라스: 세기의 디바 (원제: Maria by Callas: In Her Own Words) 신화는 계속 된다
  • 곽은주 기자
  • 승인 2019.08.04 2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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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한 프리 마돈나

 

사진= 영화사 진진 제공
사진= 영화사 진진 제공

"1977916일 조르쥬 망델가 38번지. 드높은 천장과 무거운 커튼, 조각장식의 가구.... 그녀의 전설에 걸 맞는 무대에서 칼라스는 비극 오페라의 주인공처럼 쓰러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막이 다시 오르지 않았고, 어둠 속에서 천둥치듯 몰아치던 박수 소리도 없었다. 쓰러진 육신 속에 구현되어 있던 노르마, 루치아, 메듀사, 레오노레, 지오콘다....모든 신화의 인물들이 이제는 호흡을 멈췄다.‘20세기 후반의 가장 위대한 벨칸토'는 페르 라셰즈의 묘석 밑에서 추억의 목소리가 되었다고 불문학자 김화영은 1977년 프랑스에서 칼라스의 죽음을 애도했다(피에르 장 레미의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발문 중 ).

사진=영화사 진진 제공
사진=영화사 진진 제공

"사람들이여 조용히 하라 이제 막이 열리면 신화가 시작되리라던 관객의 열광도 사라진지 이미 오래. 칼라스가 사망한지 42. 한 줌 흙으로 묻혀 있던 그녀의 인생과 음악이 요술램프의 지니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부붕~ 우리를 찾아 왔다. <마리아 칼라스: 세기의 디바>. 영화를 연출한 톰 볼프 감독은 우연히 칼라스의 음반을 듣고 매혹되어 칼라스의 일생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다. 3년 동안 자료를 찾으러 세계를 뒤집고 다녔다. 칼라스 전성기에 살았던 이들을 만나고, 그녀와 가까운 친구, 동료들을 마나고, 그녀의 광팬들을 만나고 그들이 소장한 미공개 영상과 편지들을 모았다. 영화에 담긴 자료의 50% 이상이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자료들. 칼라스는 생전에 절친했던 나디아 스탠시오프에게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죽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진정으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해주길 바란다.”는 말을 남긴다. 마치 유언처럼. 당시 자신에 대한 풍문과 오해와 편견에 일일이 응대하기 힘들었을까? 진실을 유보한 채 남겨둔 이야기들. 영화를 통하여 진솔하게 밝혀질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영화는 설명하는 내레이션이나 지인의 인터뷰 없이 오직 칼라스의 인터뷰와 편지와 공연 실황과 사적인 영상들로 구성됐다. 칼라스가 남긴 편지는 그녀의 인생을 극영화로 담은 <칼라스 포에버>(2002)의 주연 배우인 파니 아르당이 목소리 연기로 참여했다. 칼라스가 사망하기 3년 전 인터뷰 영상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인터뷰 내용을 부연 설명하듯 당시의 실황 공연과 지극히 사적인 영상들이 교차된다. 아 그랬구나!! 우리가 미처 몰랐던 그녀의 깊은 고뇌와 음악을 대하는 그녀의 겸허함이 맑은 눈물처럼 관객들 마음에 조용히 스며든다.

마리아 칼라스(1932-1977)의 삶은 사랑의 역사이며 관객은 그녀의 사랑으로 하나의 전설을 만든다. 칼라스는 <노르마> 89, <라 트라비아타> 63, <루치아> 45, <토스카> 33, <메두사> 31회 공연한 것으로 기록됐다. ‘비올레타’, ‘토스카가 바로 그녀의 인생이다. 음악을 마시고 호흡하고 음악으로 가득 찬 인생. 아테네 음악원 시절 그녀는 모든 것을 흡수하려는 해면체와 같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어머니의 강요에 의하여 시작된 음악 수업이었지만, 아테네음악원에서 엘리라 드 이달고를 만나면서 칼라스는 새롭게 탄생한다. 이달고는 몸가짐과 걸음걸이 어깨를 당당하게 펴는 방법, 두 팔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등등을 가르친다. 무대에 선 칼라스는 손과 팔에도 음악적 영감을 불어 넣는다. 칼라스를 통하여 연기하는 오페라 가수가 비로소 탄생한다.

사진=영화사 진진 제공
사진=영화사 진진 제공

칼라스는 1947년 베로나의 아레나에서 <라 조콘다>로 데뷔. 마에스트로 툴리오 세라핀의 눈에 든 칼라스는 1949년 주연 소프라노가 펑크 낸 오페라 <발퀴레>에서 공연하게 되고, 이 공연은 세계적인 가수가 되는 시발점이 된다. 그 무렵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1896~1981)와 결혼한다. 1956년 오페라 <노르마>로 꿈꾸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서 데뷔하지만 그 이후의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1959년 남편과 갈등을 겪던 무렵, 칼라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가 초대한 요트 여행에 남편과 함께 향하고 오나시스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칼라스는 이혼을 선언하지만 이탈리아 법으로 이혼이 승인되지 않아 수년간 법정 싸움을 벌인다.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취득한 후에야 칼라스는 남편과 이혼할 수 있게 된다. 1965<노르마> 공연 중 실신한 칼라스는 1968년까지 공연을 하지 않는다. 1969년 다시 무대에 오르는 일에 두려움을 느낀 칼라스는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감독의 영화 <메데이아>에 출연한다. 1971년과 1972년 뉴욕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은 그녀. 1973년 칼라스는 1년 반 동안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런던에서 일본까지 세계 대도시를 순회하며 공연한다. 197410월 이화여대 강단에서 공연 이후 197411월 일본 공연이 칼라스의 마지막 라이브 공연이 됐다. 1975년부터 은둔생활을 하던 마리아 칼라스는 1977년 우울증과 수면제 과다복용이 원인이 되어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진짜로 행복한 예술가는 없어요~”라고 말한 칼라스의 말이 귓가에 윙윙 울린다. "제 진짜 모습도 시간이 알려 줄 겁니다.”라는 그녀의 말처럼 이제는 신화도 전설도 아닌 한 인간 마리아 칼라스의 참 모습이 영화 속에 오롯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곽은주 기자 cineeun6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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