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거인’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별세
‘재계 거인’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별세
  • 손성은 기자
  • 승인 2020.01.20 15: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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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꿈’ 키우던 소년 일본서 “신의‧성실” 사업가로 성장
‘롯데껌’으로 시작, 국내 재계 5위 ‘롯데그룹’ 일궈낸 거인
국내 유통‧관광 산업 근대화 평가…말년 경영권 분쟁 그늘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 명예회장이 19일 별세했다. 향년 99세. 신 명예회장은 1921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1948년 일본 도쿄에서 롯데홀딩스의 전신인 롯데를 창업했다.(사진=롯데지주 제공)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 명예회장이 19일 별세했다. 향년 99세. 신 명예회장은 1921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1948년 일본 도쿄에서 롯데홀딩스의 전신인 롯데를 창업했다.(사진=롯데지주 제공)

‘재계 거인’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별세했다. 이에 따라 롯데는 완전한 포스트 신격호 시대를 맞이했고 재계는 창업 1세대 시대의 완전한 막을 내리게 됐다. 고인은 20대 일본으로 건너가 제과업 성공을 기반으로 한국에서 재계 5위의 롯데그룹을 일궈낸 신화적인 인물이다. 성공 가도를 달려 온 그였지만 말년 신동주‧신동빈 형제의 경영권 분쟁이라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파란만장한 삶을 돌이켜 본다. <편집자 주>

[한국뉴스투데이]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9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노환으로 입원 중이던 고인은 지난 19일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영면에 들었다. 고인은 재계 창업 1세대로 국내 재계 순위 5위 롯데그룹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다.

◇ 문학 꿈 키우던 청년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1921년 11월 3일(주민등록상은 1922년 10월 4일) 경남 울산에서 부친 신진수씨와 모친 김필순씨의 5남 5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고인은 어린 시절 10km 이상 떨어진 거리를 걸어 통학하며 문학의 꿈을 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1939년 울산농업전수학교를 졸업하고 1년 뒤 고 노순화씨와 결혼을 한 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신문‧우유 배달을 하며 와세다 고등공업학교 화학과를 졸업했고, 동시에 사업가로서 발을 내디뎠다.

신격호 명예회장이 일본에서 신문‧우유배달을 할 당시 그의 신의와 성실함은 유명했고 이에 반한 일본인 사업가가 사업자금을 대줘 선반용 기름 제조사업을 시작했으나 이후 식품업으로 발길을 돌렸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1948년 종업원 10명과 함께 롯데를 설립해 ‘롯데 그린껌’을 일본 시장에 내놓았다. 당시 일본 역시 넉넉하지 않은 시절이었던 만큼 ‘껌’의 성공 가능성에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데껌’은 성공을 거뒀고 이를 바탕으로 롯데는 식품 사업에서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롯데가 식품 기업으로 자리 잡은 이후 신격호 명예회장은 사업 영역을 확대해나가기 시작했다. 1959년 롯데상사를 설립한 데 이어 1961년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었고 1968년 물산으로 발을 뻗어 나갔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사업가로 성장해나가면서도 조국을 잊지 않고 있었다. 사업 시작 초기였던 1950년부터 모국인 한국에서의 사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1965년 한일수교를 기점으로 한국에 역진출했다.

◇ 한일 오가며 진두지휘… 재계 5위 롯데 일궈내

신격호 명예회장은 1967년 양국 수교로 한국과 일보의 경제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던 가운데 자본금 3000만원으로 롯데제과를 창립했다. 롯데제과의 설립은 당시 먹거리가 풍족하지 않았던 국내 아이들에게 다양한 간식거리를 제공하고자 했던 뜻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 진출한 신격호 회장은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1973년 호델롯데와 롯데전자를 다음 해에는 롯데산업과 롯데상사. 롯데칠성을 설립했다. 1979년에는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해 롯데케미컬, 롯데리아, 롯데쇼핑 등을 설립하고, 서울 소공동에 롯데백화점을 개장했다.

1979년에 개장한 소공동 롯데백화점은 기존 국내 백화점 대비 2~3배에 달하는 크기였을 뿐만 아니라 개장 100일 만에 1000만 명의 인파가 몰리는 기록을 세우는 등 대호황이었다. 당시 수도권 인구는 800만 명 수준이었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한국에서 사업 영역을 확장해 롯데는 식품, 유통, 관광, 석유화학 등을 아우르는 재계 서열 5위의 대그룹으로 성장했다.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오가며 사업을 진두지휘한 신격호 명예회장은 지난 1990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억만장자 순위 9위에 뽑히기도 했다.

롯데그룹을 일궈낸 신격호 명예회장의 숙원은 한국의 ‘랜드마크’ 건설이었다. 1987년 한국을 대표하는 초고층 빌딩을 짓겠다며 서울 잠실에 부지를 매입했다. 관련 규제 문제로 진척을 보지 못했던 그의 숙원은 2010년 ‘제2롯데월드타워’ 착공해 2015년 완공하며 마무리 됐다.

19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 고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사진=롯데그룹 제공)
19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 고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사진=롯데그룹 제공)

◇ 성공가도 달린 재계 거인 말년에 드리운 그림자

한일 양국에서의 성공과 숙원이었던 제2롯데월드타워를 건설하는 등 성공 가도를 달린 신격호 명예회장이었지만 말년은 어두웠다.

제2롯데월드타워 건설 과정에서 불거진 각종 특혜 의혹과 인명 사고에 따른 안전 논란이 신격호 명예회장을 따라다녔다. 여기에 지난 2017년 불거진 경영비리 의혹으로 징역 4년, 벌금 35억원 선고받기도 했다.

가장 짙은 그림자는 롯데그룹의 경영권 분쟁이었다. 지난 2015년 장남 신동주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경영권 분쟁이 불거졌다. 두 아들 간의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신격호 명예회장은 롯데그룹의 지주회사 격이었던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직에서 물러났고, 국내 계열사 이사직에서 퇴임해야만 했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재계 마지막 창업 1세대로 한국 대한민국 경제의 유통, 관광 사업을 근대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인의 별세로 대한민국 재계의 창업 1세대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리고 롯데 역시 완전한 ‘포스트 신격호’ 시대로 접어들었다.

한편, 신격호 명예회장의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됐으며 오는 22일까지 롯데그룹장으로 치러진다. 명예장례위원장은 이홍구 전 국무총리, 반기문 전 UN사무총장이, 장례위원장은 황각규 롯데지주 대표, 송용덕 롯데지주 대표이사가 맡는다.

손성은 기자 katpa8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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