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를 보았다”
“황제를 보았다”
  • 성지윤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4.2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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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예술가가 각기 다른 장르로 표현한 황제
사상과 가치관 따라 다른 배경으로 작품 탄생

[한국뉴스투데이] 누구나 타인을 보면 느낌이라는 것을 갖게 된다. 때로는 그런 느낌이 이미지로 치환되는 경우가 있는데, 어떤 이를 보고 황제와 같다고 느낀 적이 있다. 이 느낌을 준 사람은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교포 사업가였다. 그는 자신과 같은 성공자를 양산하고자 한국의 사장들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주며 선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었다. 우연히 그의 유튜브 강연을 본 후 필자는 사업가의 철학과 인성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그분이 쓴 책들을 정독하고 유튜브 동영상을 모두 검색해서 봤다. 책과 동영상을 찾아보며 그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알 수 있게 되었는데, 그는 업종과 규모에 상관없이 대한민국 사장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마침 부와 사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던 시기였기에 그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때 받은 그 기업인이 강단에 서서 열의 넘치는 강의를 하던 모습은 거인, 그리고 황제와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만약 과거 황제가 존재하는 시대에 황제를 봤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사람이라는 존재가 뿜어내는 아우라가 이토록 웅장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그 기업가의 가르침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로 예전부터 즐겨 들어온 베토벤의 <황제>를 더 자주 듣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베토벤의 <황제>를 들으면 그분이 다시 떠올랐다. 교육생들에게 주었던 온화하면서도 깊고 장엄한 공기의 에너지가 교향곡을 통해 다시 전달되는 것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베토벤 피아노교향곡 5번 '황제'의 ‘도이치그라모폰’사의 앨범자켓
▲베토벤 피아노교향곡 5번 '황제'의 ‘도이치그라모폰’사의 앨범자켓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5번인 <황제>는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장르의 대표곡 중 한 작품이다. 베토벤은 180812월경부터 이 곡의 스케치를 시작해서 1809년 여름에 완성했다. 베토벤이 한창 곡 작업을 하던 중인 1809년도에 빈이 나폴레옹 군에 의해 점령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베토벤은 동생 집 지하실로 피신해서 생활했는데 그를 후원하던 귀족들이 모두 달아나 수입이 끊겼다. 경제적인 궁핍이 극에 달했고 생명의 위협 속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시기였다. 이후 전쟁이 정리되어 감에 따라 다시 안정을 찾았고 피아노 협주곡 제5<황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곡은 자신의 후견자 겸 제자인 루돌프 대공을 위해 작곡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곡 작업에 임한 지 2년 반이 지난 181111월에, 이 작품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성공리에 초연됐다.

<황제>라는 부제는 웅장한 느낌을 주는 1악장 때문에 붙여졌다. 이 제목은 곡의 장대하고 심포닉한 아름다움으로 곡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면이 많지만, 명칭 자체는 베토벤 자신에 의해 지어진 것은 아니다. 베토벤 동의하에 친한 친구인 독일계 영국 피아니스트 겸 출판업자 요한 B.크라머가 런던에서의 출판을 위해 만든 것이다.

3악장으로 이뤄진 피아노협주곡 <황제>는 모든 악장의 곡이 다 유명한 걸작이다. 그중에서도 맑은 선율의 흐름이 무척 아름다운 2악장이 <황제>를 대표하는 곡으로 알려져 있다. <황제> 2악장은 새벽 대기의 기운을 머금은 듯 한없이 성스럽고 명상적인 선율이 약음기를 사용한 바이올린의 연주로 이어진다. 그 위에 펼쳐지는 맑고 투명한 피아노 연주가 변주형식으로 진행되며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해와도 같이 마음속 심연을 파고든다. 여기에 더해 트릴(2도 차이나는 음 사이를 빠르게 전환하는 꾸밈음) 연주 또한 인상적으로 빛이 난다. 전체적으로 숭고한 느낌을 자아내는 곡의 분위기는 제목에 대한 이해를 돕고 사색의 숲을 거닐 도록 만든다.

음악에 <황제>라는 곡이 있다면 미술에서도 황제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있다. 엄격하고 위엄있는 화풍이 특징인 신고전주의 양식을 대표하며 프랑스화단의 권력자로 군림하던 자크루이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1세 대관식>이 그중 하나다.

파리에서 출생하여 일찍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다비드는 당시 화가지망생들이 동경하던 <로마 대상>을 받았다. 그는 로마로 유학하여 고대 미술에 큰 감명을 받아 역사화를 그렸다. 그리고 고전주의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 후 프랑스에 귀국하여 <살롱>에 그림을 출품한 뒤 루이 16세에게 발탁되어 궁전화가가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부와 명예 그리고 많은 제자를 둔 성공한 미술가였다.

다비드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에 가담하여 투옥되기도 했으나, 나폴레옹 집권 후 복권되어 나폴레옹의 전속화가로 일했다. 나폴레옹은 다비드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하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선전 매체로서 예술의 힘을 잘 활용했던 것이다. 이로써 다비드는 나폴레옹 1세의 정치체제에 협력하는 궁정화가가 되어 탄탄대로를 밟아 나갔다.

▲나폴레옹 1세 대관식(출처:위키디피아)
▲나폴레옹 1세 대관식(출처:위키디피아)

<나폴레옹 1세 대관식>은 나폴레옹이 1804년에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로 등극하는 순간인 보나파르트의 대관식장면을 그림을 통해 기록한 작품이다. 압도적인 스케일의 이 작품은 3년여에 걸쳐 제작된 대작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실제처럼 묘사하기보다 황제의 권위와 위엄을 살리기 위해 상당 부분 각색하여 그렸다. 원래는 나폴레옹이 스스로 왕관을 쓰는 장면을 그리려고 했지만 교황 측의 항의로 조제핀에게 씌워주는 것으로 바꿨다. 또한, 나폴레옹 가족들과 황후 조제핀과의 관계가 나빴기 때문에 실제로는 나폴레옹의 어머니와 누이들은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화목한 가정의 모습으로 보이기를 원했던 나폴레옹의 요청에 따라 근엄하게 즉위식에 참석한 가족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조제핀도 필요 이상의 아름다운 성녀 이미지로 표현되는 등, 이 외에도 나폴레옹은 그림 제작 시 여러 번 찾아와서 수정을 지시하며 그림을 미화시켰다.

누구보다도 일찍 이미지 정치의 중요성을 간파했던 나폴레옹은 다비드의 재주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공고히 다졌다. 다비드는 이러한 나폴레옹의 야심을 잘 맞춰주면서 자신의 권력욕을 채워 예술계의 권력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정치와 야합한 예술가의 말로는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그는 나폴레옹 퇴위 후 추방되어 브뤼셀로 망명했고 77세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두 예술가가 각기 다른 장르로 황제를 표현했지만, 그들에게 내재된 황제를 향한 마음은 극명하게 달랐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혁명정부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황제로 등극하는 것에 강한 반감을 가졌다. 그래서 그를 위해 작곡했던 교향곡 3<영웅>을 헌정하려는 계획을 철회했다. 이와는 반대로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비위를 맞춰주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궁정화가가 되었다.

예술에 있어서도 사상과 가치관에 따라 이렇게 다른 배경으로 작품이 탄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삶에 있어 우리는 어떤 배경을 가지고 인생을 만들어 가야할까? 문득 황제의 이미지를 가진 기업가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다가온다. 나는 과연 내 삶에 있어 스스로 납득할만한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성지윤 칼럼니스트 claramusic89@naver.com

성지윤 칼럼리스트

음악을 전공하고 현재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교육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클라라뮤직을 운영중에 있다.
또한 미술,사진,연극, 문학 등 다양한 얘술분야에 대한 탐구와 이해를 토대로 음악이 타장르 예술들과 만났을때의 흥미로운 점들을 발견하면서 예술융합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연구 및 교육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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