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영원한 영웅, 국가대표 유상철을 기억하며
대한민국의 영원한 영웅, 국가대표 유상철을 기억하며
  • 김현지 기자
  • 승인 2021.06.11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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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파이터 기질과 뛰어난 제공권 장악 능력, 탄탄한 내구성이 장점
온국민의 함성으로 가득했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 한가운데 ‘우뚝’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 주역인 유상철 전 프로축구 K리그1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이 향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2019년 하나원큐 K리그 어워드 2019 시상식이 열린 서울 서대문구 그랜드힐튼호텔 컨벤션홀에서 베스트포토상을 받은 유상철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이 수상 소감을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 주역인 유상철 전 프로축구 K리그1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이 향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2019년 하나원큐 K리그 어워드 2019 시상식이 열린 서울 서대문구 그랜드힐튼호텔 컨벤션홀에서 베스트포토상을 받은 유상철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이 수상 소감을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한국뉴스투데이] 축구계의 큰 별이 하나 졌다. 별이 졌다는 표현은 조금 진부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유상철은 한국 축구에 있어 정석적인 영웅 그 자체였기에 그 진부한 표현이 썩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2002년 월드컵을 보았던 사람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2002년 그 뜨거웠던 월드컵의 현장,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결정적인 중거리 슛을 터뜨렸던 호기로운 청년의 모습을. 골키퍼를 지나쳐 골대 왼쪽으로 들어간 공을 확인하고 두 팔을 벌리며 뛰어다니던 붉은 유니폼의 청년이 바로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축구선수 유상철이었다.

축구 인생의 서막

그가 처음 축구를 시작한 건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축구부 선생님의 눈에 띄어 처음 차보았던 축구공. 그때부터 축구공은 그의 발치에서 한 시도 떨어질 날이 없었다. 공과 함께 뛰었던 그 길이 삶이고 인생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본격적인 선수 생활은 1994, 프로 축구팀인 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감독은 모교 선배였던 차범근이었다.

이제 갓 필드에 발을 올린 젊은 선수는 선배 감독의 가르침을 받으며 국가대표로의 꿈을 키워나갔다. 프로로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경력도 적은 유상철이었지만 그의 투지는 실로 어마무시했다. 어린 선수 특유의 미숙함은 불타는 의지 너머로 감춰졌다. 결국 그는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당당히 국가대표의 중요포지션을 따내고야 말았다.

겨울이 가고 막 봄이 시작되려는 3월이었다. “유상철은 타고난 파이터 기질과 뛰어난 제공권 장악 능력, 나아가 부상 없는 탄탄한 내구성이 정말 일품이었다, 당시 언론에선 그를 두고 탄복에 가까운 찬사를 쏟아내었다. 대한민국 축구계에 길이 남을 한 선수의 인생이 막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필드 위의 전사

유상철을 생각하면 넓은 경기장을 종횡무진 뛰어다니고 어디든지 돌진하며 끝까지 주저앉지 않는 강인한 육체와 정신이 떠오른다. 부릅뜬 눈 속에 어른거리는 열정마저도. 선수들 사이에서 그의 눈빛은 마치 날 것의 무언가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는 어떤 경기에서든 무섭게 싸웠다. 유상철은 선수이기를 넘어 한 명의 전사였다. 경기 중에 코가 부러져도, 유니폼이 찢어져도 그는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다. 때로는 미드필더로, 어떨 때는 스트라이커로, 혹은 윙백으로 포지션을 바꾸기도 했다. 어느 위치에 서든 그저 죽을 각오로 뛰었다. 어쩌면 이후의 안위에 대한 걱정은 아예 생각조차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유상철의 전부는 필드에서 뛰는 순간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작된 2002년 월드컵. 그 열기는 대한민국의 거리를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대한민국의 순위는 아주 낮았고 16강의 벽은 너무 높았다. 폴란드와의 경기를 앞두고 모든 선수는 특히 긴장해있었다. 이전까지는 1승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경기로 첫 승리와 16강 진출이 모두 결정된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필드에 나란히 서 있는 선수들의 눈에는 긴장을 넘어 두려움까지도 어려 있었다.

우승에 대한 부담감 속에서, 경기는 시작되었다. 필사적인 플레이, 불안과 긴장으로 꽉 죄여오는 심장을 조금이나마 느슨하게 박동하게 해준 것은 전반 26분에 터진 동료 선수 황선홍의 골이었다. 유승철은 동료의 골에 보답하듯 후반 9분에 중거리 슛을 성공시켰다. 경기장은 커다란 함성으로 가득 찼고. 환희에 찬 국민의 목소리로 먹먹하게 귀가 멀었다. 유승철은 국민에게 두 팔을 크게 흔들었다. 당시 그의 왼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밝혀진 사실이었다.

그 골을 넣긴 했지만, 이후에도 계속 전광판을 보면서 시간이 몇 분이 지났는지 확인했어요. 그 정도로 너무 시간이 안 가더라고요.”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처음 이뤄낸 1승의 달콤함, 그리고 20이라는 경이로운 스코어에 유상철과 동료들은 한동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승리의 주역. 유상철의 쐐기골은 대한민국을 기적의 나라로 만들었다. 그가 있었기에 대한민국 4강 신화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 뜨거웠던 그해 여름의 함성이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히 기억되는 이유다.

▲김병지(왼쪽부터)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황선홍 전 대전하나시티즌 감독, 최용수 전 FC서울 감독, 안정환, 현영민 해설위원, 이천수 대한축구협회 사회공헌위원장이 8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의 빈소에서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김병지(왼쪽부터)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황선홍 전 대전하나시티즌 감독, 최용수 전 FC서울 감독, 안정환, 현영민 해설위원, 이천수 대한축구협회 사회공헌위원장이 8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의 빈소에서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고귀한 영웅을 기억하며

축구선수 유상철. 대한민국의 이름을 걸고 필드 위를 누볐던 자랑스러운 국가대표. 언제까지나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던 그 단단한 육체도 결국은 피로를 느끼고야 말았다. 선수의 자리에서 내려와 미래의 후임을 양성하고 있던 시기였다. 유상철 감독의 황달 소식이 전해지자 팬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었으나 당시 그가 몸담고 있던 인천 유나이티드는 큰일이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이는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 병원에서 결국 췌장에 자리 잡은 암 덩어리를 발견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평생 무서울 게 없던 그였지만, 생명을 갉아먹는 병마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서늘하게 혈관에 꽂히는 바늘과 몸속으로 퍼지는 약 기운을 느끼며 자신보다 앞서 삼십 차례나 암 투병을 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 몸보다 마음이 더욱 아팠다. 어머니를 괴롭혔던 암도 그와 같은 췌장암이었다.

이걸 말로 표현해서 전달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도망가고 싶죠. 포기하고 싶고. 주사를 맞으러 가야 하는 날이 오면, 횟수가 넘어갈수록 공포감이 와요.”

무서워요. 언제나 강하게 싸웠던 그의 모습과 대비되는 솔직한 고백에 마음이 아렸다. 하지만 그는 다시 말했다.

다들 걱정해주고 빨리 이겨내라고, 이겨낼 수 있고 응원해준 것이 큰 힘이 돼요. 저보다 더한 사람이 분명 있을 거예요, 그렇죠? 중간에 포기하고 싶고 얼마나 힘들겠어요. 근데 그런 분들한테도 제가 이렇게 이겨냈다는 걸 보여줘서 같이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는 약속했다. 반드시 병을 이겨내리라고. 한 번 했던 약속은 반드시 지켜내는 사람이란 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거짓말처럼 좋아진 모습으로 인천 유나이티드로 복귀했다. 성남의 잔류 확정과 인천의 강등권 탈출이 걸려있던 중요한 경기 날이었다. 초반부터 많은 카드가 나올 정도로 경기는 치열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쏟아졌다.

유상철 감독은 좀처럼 자리에 앉지 못하고 비를 맞으며 선수들한테 끊임없이 지시를 내렸다. 현역 시절, 어떤 일이 있어도 쉬는 법이 없었던 그의 모습이 여전히 선명하게 살아있었다. 그들의 절실함이 전해진 것인지, 후반 30분과 43분에 터진 두 개의 골로 인천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는 끝내 인천의 잔류를 확정시키고 또 한 번 팬들과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선수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경기에 임했던 유상철 감독. 왜 경기 내내 비를 맞으며 지휘했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이 정도 비는 따듯하게 옷을 입으면 충분히 맞을 수 있고, 또 선수들도 비를 맞으면서 열심히 하는데 같이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참으로 그다운 답변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잘 견뎌내고 이겨내서, 빠르게 회복해서 좋은 모습으로 다시 찾아뵙겠다는 약속까지 걸어내고 인터뷰를 마쳤던 그는, 정말로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기적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또 한 번의 성공 신화를 일구어낸 유상철. 투지에 불탔던 영웅. 하지만 그는 찬란한 영광을 뒤로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른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모습은 언제까지나 국민의 마음속에 기억될 테다. 전의에 불타던 두 눈, 수없이 필드 위로 흘려낸 고귀한 땀방울. 언젠가 그는 말했다. 나는 늘 나보다 우리가 좋았고 함께 기쁘고 싶었다고. 이제 육신은 없지만, 정신만은 영원히 남아 후대로 전해질 것이다. 또 다른 선수들이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필드를 달릴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이었다.

김현지 기자 suricat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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