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주년 특별기획】 10월 4일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10월 4일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1.10.13 1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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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10월 그날①]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10월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는 ‘달(月)’이다. 우리 현대사의 굵직한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 10월에 몰렸으며, 그것이 1979년 10월에 이뤄졌다는 점이다.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을 비롯해서 부마민주항쟁, 그리고 10.26 사건까지 숨쉴 틈 없이 달려온 시기가 바로 1979년 10월이다. 1979년 10월이 우리 현대사에 주는 의미가 상당히 크다. 산업화의 시대에서 민주화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바로 1979년 10월이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뉴스투데이에서는 창간 10주년을 맞이해 1979년 10월 그날을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지난 1979년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신민당사에서 농선중인 YH 무역 여공들을 격려하고 있다. 김영삼 의원은 YH사건으로 의원직 제명을 당했고 "닭의 목아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사진/뉴시스)
지난 1979년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신민당사에서 농선중인 YH 무역 여공들을 격려하고 있다. 김영삼 의원은 YH사건으로 의원직 제명을 당했고 "닭의 목아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사진/뉴시스)

[한국뉴스투데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광야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외쳤던 한 사람의 말이다. 1979년 10월 13일은 신민당 총재 김영삼 의원이 제명된 날이다. 김영삼 의원의 제명안이 국회에 발의되자 김영삼 총재는 이같이 외치면서 민주주의를 갈망했다. 하지만 그 갈망과는 다르게 제명안은 통과됐고, 그것이 박정희 정권의 무너지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발단은 1979년 8월 9일로 넘어간다. 당시 가발 수출회사 YH무역 여성 노동자 172명이 서울시 마포구에 있는 신민당 당사를 찾아가 농성에 돌입했다. 20대 여성 노동자들은 근로조건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면서 신민당 당사에 진입했다. 이른바 ‘YH무역사건’이 발발한 것이다.

김영삼 “너희가 저 여공들을 다 죽이려 하느냐”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 의원은 이들을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우리 신민당사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면서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주겠으니 걱정말라”고 연설했다. 그리고 김영삼 총재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신민당 당사 주변을 순찰하면서 경찰청 정보과, 보안과에서 나온 형사들을 발견하면 멱살을 잡거나 발길질을 하거나 따귀 등을 치면서 쫓아냈다.

하지만 경찰은 8월 11일 신민당에 최후통첩을 내렸다. 그러나 김영삼 총재는 건방지다면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마포경찰서장을 만나 “너희들이 저 여공들을 다 죽이려느냐”면서 뺨을 올려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여명의 경찰이 신민당사로 진입했고, 몸싸움을 벌였지만 신민당 당직자들은 역부족이었다. 23분만에 진압작전은 완료됐고 YH무역 노동자들은 모두 강제연행됐다. 하지만 이 과정 속에서 김경숙씨가 추락하여 사망했고, 김영삼 총재는 경찰에 의해 상도동집으로 강제로 끌려갔다.

박정희 정권에 눈엣 가시 같았던 김영삼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 총재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1978년부터 김영삼 총재를 처리하려고 했지만 그동안 기회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YH무역 사건을 기회로 김영삼 총재를 처리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마음먹은 행동은 곧바로 실행해 옮겨졌다.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 총재에 대한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 하지만 법원은 9월 8일 이에 대해 취하했고 김영삼 총재는 9월 16일자 ‘뉴욕타임스’와의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철회하라는 의사를 발표했다.

해당 언론 매체에서 김영삼 총재는 “미국이 한국에 대해 원조제공을 중단하고 정부에 대해 민주화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하라”고 촉구했다. 이 인터뷰가 나가자 9월 22일 공화당과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 160명이 전원 이름으로 국회에 김영삼 총재에 대한 ‘징계동의안’을 제출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김영삼 총재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사진은 지난 1972년 5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영삼 심민당 총재를 접견하는 모습. (사진/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박정희 정권에서 김영삼 총재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사진은 지난 1972년 5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영삼 심민당 총재를 접견하는 모습. (사진/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징계 사유는 “국회의원 김영삼은 국회법 제26조에 의한 국회의원으로서의 신분을 일탈하여 국헌을 위배하고 국가안위와 국리민복(國利民福)을 현저히 저해하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등 반국가적 언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주권을 모독하여 국회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으므로 국회법 제157조에 의해 징계를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에게 박정희 정권 지지를 철회하라고 촉구한 인터뷰 기사를 낸 것은 사대주의에 해당한다는 것이 그 사유였다.

9월 22일 김영삼 징계동의안을 제출한 공화당과 유정회는 통합 당무회의를 열어 징계 종류는 제명으로, 징계 시기는 정기국회 회기 중이라고 못을 박았다.

결국 김영삼 의원직 제명

10월 4일 공화당과 유정회는 김영삼 국회의원직 제명을 요구했고, 국회에서 여당 단독으로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박탈을 의결했다. 신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 점거를 했지만 당시 백두진 국회의장이 구두로 법제사법위원회에 징계동의안을 회부하고, 이후 3분 후에 소집된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야당의원에게는 알리지 않고 날치기 통과를 했다.

백두진 의장은 다시 국회법 제140조에 따라 내무부에 연락해 경찰권을 발동했고, 본회의장을 146호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사복경찰 300여명이 146호의 진입로를 막으면서 야당 의원들의 진입을 차단시켰다. 무기명 비밀투표를 실시, 159명의 여당 의원이 참석해서 찬성 159표로 김영삼 의원을 제명시켰다.

김영삼 총재가 의원직 제명되면서 곧바로 가택 연금됐다. 신민당 소속 의원 66명과 민주통일당 의원 3명은 10월 13일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에 반발해서 집단 사퇴를 제출했다. 그러자 공화당과 유정회는 ‘사퇴서 선별수리론’이 제기되면서 부산과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이 크게 자극됐고, 이것은 해당 지역 민심을 크게 자극하게 됐다.

10월 15일 부산광역시 부산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0월 16일 다른 대학교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가담하게 된다. 이어 10월 17일 부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서 부마 민주항쟁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의원직 제명

의원직 제명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 전무후무하다. 의원직 자진사퇴가 있었을 뿐이지 실제로 제명된 의원은 김영삼 의원 뿐이다. 그만큼 국회의원 제명이란 쉽지 않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YH무역 사건을 계기로 눈엣가시 같은 김영삼 총재를 제명하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권 연장의 꿈을 실현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영삼 총재의 제명이 곧 박정희 정권 몰락으로 이어졌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오늘날에도 경쟁 정당의 의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제명안’을 제출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김영삼 총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주현 기자 leejh@koreanews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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