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주년 특별기획】 박정희 시해 ‘10.26사건’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박정희 시해 ‘10.26사건’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1.10.26 0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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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10월 그날③] 그날 육본으로 가지 않았다면

10월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는 ‘달(月)’이다. 우리 현대사의 굵직한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 10월에 몰렸으며, 그것이 1979년 10월에 이뤄졌다는 점이다.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을 비롯해서 부마민주항쟁, 그리고 10.26 사건까지 숨쉴 틈 없이 달려온 시기가 바로 1979년 10월이다. 1979년 10월이 우리 현대사에 주는 의미가 상당히 크다. 산업화의 시대에서 민주화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바로 1979년 10월이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뉴스투데이에서는 창간 10주년을 맞이해 1979년 10월 그날을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1964년 12월 6일부터 12월 8일 독일(당시 서독) 베를린에 도착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환영행사에서 연설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1964년 12월 6일부터 12월 8일 독일(당시 서독) 베를린에 도착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환영행사에서 연설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한국뉴스투데이] 그날 오전 그는 총을 만지작 거렸다. 1979년 10월 26일 아침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함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당진에 있는 KBS 송신소 준공식에 가려고 했다. KBS 송신소는 대북방송을 위해 지어진 중앙정보부 보안시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은 김재규 부장을 일방적으로 제외시켰고, 송신소 준공식은 김재규 부장이 없는 상황에서 진행됐다. 김재규 부장은 자신이 행사에 빠지자 차지철 실장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준공식에 돌아오면서 차지철 실장은 김재규 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6시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부지 내에 있는 중앙정보부 소속 안가로 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을 전했다.

박정희·차지철을 죽일 것

이때 김재규 실장은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김정섭를 궁정동 안가에 불렀다. 안가에 도착한 김재규 부장은 먼저 와있던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실장을 죽일 것이라고 전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실장이 들오면서 김재규 실장은 총을 자신의 바지주머니에 숨기고 박정희 대통령을 대면했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가수 심수봉과 여대생에게 보안 서약서를 쓰게 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부장, 차지철 실장, 김계원 실장, 가수 심수봉, 여대생 등은 전통 한국식 만찬 교자상을 앞에 두고 술을 마셨다.

이 자리에서 신민당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온건한 자세에 대해 질타를 했다. 그리고 부마민주항쟁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는데 이때 차지철 실장이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탱크로 눌버려야 한다”고 말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동의를 했다. 그러면서 4.19 혁명 당시 곽영주가 임의로 발포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지만 대통령인 자신이 국가원수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답변했다.

김재규 부장은 궁정동 안가에 도착한 정승화 참모총장과 김정섭 제2차장보를 만나 대통령과의 술자리가 길어질 것 같다면서 양해를 구했다.

그날의 총소리

그리고 다시 연회장으로 가서 문 앞에서 총 점검을 했는데 차지철 실장이 문을 열고 나왔다. 김재규 부장은 급하게 총을 바지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차지철 실장이 들어오자 김재규 부장은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불러서 박선호에게는 대통령 경호처장 정인형, 대통령 경호부처장 안재송을 처단하고, 박흥주에게는 경비원과 주방 경호원을 없애라고 지시를 내렸다.

김재규 부장이 만찬장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가수 심수봉이 노래를 끝내고 여대생이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이때 김재규 부장이 갑자기 총을 꺼내 차지철 실장의 오른쪽 손목을 쐈고, 차지철 실장은 화장실로 달아났다.

그러자 김재규 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가슴을 쏘았고, 박정희 대통령은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때 박선호는 대통령 경호부처장과 대통령 경호처장을 차례로 쏘아 죽였고, 박흥주는 경비원과 주방 경호원을 쏘아죽였다. 김재규 부장은 차지철 실장을 조준했지만 총이 격발 불량으로 고장났다.

김재규 부장은 연회장을 빠져 나가 두리번 거렸고, 이때 박선호가 나타나 김재규 부장은 박선호의 총을 건네 받았다. 김재규 부장은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갔는데 가수 심수봉과 여대생은 박정희 대통령을 부축하고 있었다.

차지철 실장은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경호원을 찾으러 나가는 순간 김재규 부장과 마주쳤고, 옆에 있던 장을 던져 총을 쏘려고 하는 김재규 부장을 막으려고 했지만 김재규 부장은 이를 피한 후 차지철 실장을 향해 쏘았다.

그 이후 김재규 부장은 박정희 대통령 아으로 다가와 총을 겨눴고, 가수 심수봉과 여대생은 도망쳐 숨었다. 김재규 부장은 쓰러진 박정희 대통령의 후두부에 총을 쏘았고, 머리 총상을 입었다.

1979년 12월 20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관련자 김재규(전 중앙정보부장)피고인이 육군본부 계엄 보통군법회의에서 선고공판을 받기 위해 포승에 묶여 걸어오며 웃고 있다. 이날 김재규, 김계원, 박선호,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등 7명은 내란목적살인죄가 적용돼 사형을 선고 받았다. (사진/뉴시스)
1979년 12월 20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관련자 김재규(전 중앙정보부장)피고인이 육군본부 계엄 보통군법회의에서 선고공판을 받기 위해 포승에 묶여 걸어오며 웃고 있다. 이날 김재규, 김계원, 박선호,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등 7명은 내란목적살인죄가 적용돼 사형을 선고 받았다. (사진/뉴시스)

남산이 아닌 육본으로

김계원 비서실장은 연회장의 대기실에서 사건을 지켜봤고, 연회가 열린 ‘나’동이 아닌 ‘가’동에 있었던 정승화 참모총장과 김정섭 제2차장보는 총소리에 의아해했다.

김재규 부장은 정승화 총장과 김정섭 제2차장보와 함께 승용차에 올라탔다. 이때 박선호는 김재규 부장에게 남산으로 가겠냐고 물었다. 남산은 중앙정보부가 있는 곳이다. 하지만 김재규 부장은 어디로 갈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정승화 총장은 육본으로 가자고 했다. 대통령의 부고 시 군대를 출동시켜야 하는 상황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김재규 부장 역시 육본에 가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육본이 아닌 남산으로 갔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즉, 남산에서 정승화 총장을 인질로 잡고, 각료들을 불러 계엄령을 선포했다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권을 잡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한편, 김계원 실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싣고 가서 살리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청와대로 돌아와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박정희 대통령의 저격범은 김재규 부장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최규하 총리와 육본으로 가서 정승화 총장과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만나 범인은 김재규 부장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정승화 총장은 육본 헌병감 김진기에게 김재규 부장 체포 명령을 내렸고, 김진기는 김재규 부장을 체포했다. 정승화 총장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불러 김재규 부장을 인계하고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김재규 부장은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가혹한 고문과 수사를 받았다. 이때 전기고문과 물고문까지 당했다.

전두환의 등장

김재규 부장은 1980년 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내란수괴미수,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 증거은닉, 살인 등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80년 5월 24일에 박선호, 유성옥, 이기주, 김태원과 함께 서울구치소(1987년 이후 의왕으로 이전되어 지금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자리)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박흥주는 신분이 현역 군인인 관계로 1980년 3월 6일에 총살형에 처해졌다.

김재규 부장은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라고 10.26 사건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다만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김재규 부장과 차지철 실장 간의 권력다툼 속에서 빚어진 갈등이 원인이라는 것과 이로 인해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었냐는 분석도 있다.

10.26 사건은 3대 핵심 권력기관인 청와대 경호실,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중에 청와대 경호실과 중정이 무너지면서 권력의 축이 보안사령부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됐고, 전두환 정권의 시대가 열리게 된 계기가 됐다. 김재규 부장 수사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맡으면서 청와대 경호실, 중앙정보부를 접수하면서 이른바 안기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주현 기자 leejh@koreanews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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