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가는 길이 맞다
지금 가는 길이 맞다
  • 정은경 방송작가
  • 승인 2021.10.29 10: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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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머리를 쓰며 일하고 돈을 벌었다.
방송이 쉬는 적은 거의 없으니 매일매일 머리를 짜내며 방송 원고를 써댔다.

하지만 쉬운 작업은 아니다. 어떻게 만날 좋은 대본이 나올 수 있겠는가?
무슨 일이든 10년이 넘으면 전문가가 돼서 척하면 하고 나온다지만,
방송작가로 일한 지 20년이 넘었어도 ’, ‘이 된 적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글이 써지지 않을 때,
어떤 때는 2분도 안 되는 오프닝을 쓰면서 몇 시간을 잡고 있을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머리가 텅 비어버린 것이,
이제 내 머리도 수명이 다한 걸까? 자괴감이 들 때도 있다.

잠시 머리를 쉬게 해도 좋지 않을까?
1년 정도는 글을 쓰지 않고, 멍하게 있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으니 마냥 쉬어버리면 영영 쉬어야 할지도 모르는 불안감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가보지 못한 세계에 동경이 있었다.
기회만 된다면 머리 쓰는 일이 아니라 몸을 쓰는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단순 반복, 마치 기계처럼 일하고, 머리는 장식쯤으로 되는 그런 일을.
안 나오는 글을 짜내는 것보다 차라리 몸이 힘든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몸이 힘든 거야 하루 푹 쉬고 나면 다시 리셋!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어디 세상사가 그런가?

며칠 전의 일이다.
서재에 오래되고 색이 바랜 칼라박스가 있었는데,
버릴까 하다가 재활용을 해볼 요량으로 직접 페인트칠을 해보기로 했다.
요즘엔 페인트의 질도 좋으니 누구나 쉽게 칠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머리도 식힐 겸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한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일을 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처음엔 신이 났다.
나의 손길이 가는 즉시 헌 칼라박스가 새것으로 되는 게 꽤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어라? 이게 아니네,
페인트칠을 한 지 얼마 안 가서 완전 녹초가 돼 버렸다.
고작 5개를 칠하면서 2시간 조금 넘게 시간이 걸렸는데,
허리와 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팔도 저리고,
게다가 단순 반복으로 손을 써서 그런지 머리까지 띵했다.
안 써지는 원고를 2시간 동안 써도 이 정도는 아닌데,
아직 칠해야 할 칼라박스가 남았지만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
으윽. 못할 짓이다. 왜 내가 시작을 했을까? 결국, 마무리도 하지 못했다.

. 단순한 일을 너무 단순하게 봤구나.
머리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것도 아니구나.
페인트칠 2시간 만에 난 백기를 들고 말았다.
남의 일은 다 쉬워 보이고, 내 일만 왜 이리 어려울까 푸념을 했더니
제대로 한 방 맞은 기분이다.

누구나 잘 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페인트칠을 하루종일 해도 몸이 아무렇지도 않고,
누군가는 아무리 무거운 짐을 옮겨도 근육통이 생기지 않을 수 있다.
다 그 분야의 노하우가 생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
그걸 잊고 있었다.

나에게도 알게 모르게 노하우가 쌓였을 터.
아무리 글을 쓰는 데 오래 걸리는 날이 있다고 해도.
20년의 경력이 어디 갈까?

이제 알겠다. 나에겐 머리를 쓰는 일이 더 맞다.
아니, 훨씬 더 쉬운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때로는 보잘것없고, 만족하지 않은 글이 나오더라도
다시는 몸을 쓰는 일은 동경하지 않을 생각이다.
섣부르게 단순한 일이 쉽다고 덤비지도 않을 거다.

그리고 아주 나중에.
혹시나, 머리 쓰는 일이 힘들다는 생각이 다시 들 때,
매일매일 원고 쓰는 게 지겨워질 때.
나에게는 무시하지 못할 20년의 노하우가 있다며.
스스로에게 격려해줘야겠다.

삽화/ 박상미
삽화/ 박상미

 


정은경 방송작가 pdirow@naver.com

정은경 방송작가

20여 년 동안 시사, 교양 분야의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다.
주요 프로그램으로 CBS <변상욱의 시사터치>, EBS <김민웅의 월드센터>, <생방송EBS FM스페셜> KBS <보고싶은얼굴, 그리운 목소리>, <월드투데이>, <라디오주치의> tbs <서울 속으로> 등 다수가 있고, 현재는 TBS <우리동네라디오>를 시민제작자와 함께 만들고 있다.
치열한 방송현장에서 일하면서 나만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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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자 2021-12-02 15:05:47
정말 큰 깨달음을 얻었네요?^^ 나도 살림하면서, 아이들 키우면서 자질구레한 일들로 힘들때 직장생활을 했다면 이러한 일들은 그냥 지나치며 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때가 있답니다. 역시 남의 손의 떡이 커 보이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