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주년 특별기획】 전두환의 출현, 권력의 중심으로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전두환의 출현, 권력의 중심으로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1.11.01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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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10월 그날④] 보안사령관에서 합수본부장으로

10월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는 ‘달(月)’이다. 우리 현대사의 굵직한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 10월에 몰렸으며, 그것이 1979년 10월에 이뤄졌다는 점이다.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을 비롯해서 부마민주항쟁, 그리고 10.26 사건까지 숨쉴 틈 없이 달려온 시기가 바로 1979년 10월이다. 1979년 10월이 우리 현대사에 주는 의미가 상당히 크다. 산업화의 시대에서 민주화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바로 1979년 10월이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뉴스투데이에서는 창간 10주년을 맞이해 1979년 10월 그날을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전두환씨가 2009년 故 김수환 추기경의 빈소가 설치된 명동성당을 찾아 추모하는 모습. (뉴시스)
전두환씨가 2009년 故 김수환 추기경의 빈소가 설치된 명동성당을 찾아 추모하는 모습. (뉴시스)

[한국뉴스투데이] 1979년 10월 28일 어떤 한 군인이 대중 앞에 나타났다. TV브라운관에 나타난 그의 얼굴에 시민들은 생소했다. 그때까지 전두환씨는 대중에게는 익숙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박정희 권력의 주요 핵심부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이 곧 밝혀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크게 3개의 기관을 움직였다. 하나는 청와대 경호실이었다. 자신의 몸을 직접적으로 보호하는 기관으로 청와대 경호실을 움직였다.

박정희 정권 유지 3대 기관

그리고 또 다른 기관은 중앙정보부이고, 또 다른 기관은 보안사령부였다. 중앙정보부는 민간·대부방첩 부서로 검찰과 경찰을 장악하면서 사실상 민간 통제 기구로 전락했다. 보안사령부는 군내 첩보기관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이 쿠데타로 집권했기 때문에 항상 군의 동향을 예의주시해야 했다. 그리고 군대 내에 자신의 충성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에 하나회를 조직하게 하는데 그 핵심 인물이 바로 전두환이었다.

보안사는 육군방첩부대로 군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국방부 직할부대로 국방장관도 건드리지 못하는 최상위부대였고, 대통령과 중앙정보부만 보안사령부를 견제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의 경호는 청와대 경호실에 맡기면서 민간은 중정에, 군대는 보안사에 맡겼다. 그렇게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이뤄냈다. 하지만 청와대 경호실과 중정이 충돌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그것이 바로 ‘10.26 사건’이었다.

10.26 사건은 박정희 권력기관 무너진 사건

10.26 사건은 단순히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된 사건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을 뒷받침 하던 청와대 경호실과 중정이 무너진 사건이었다.

10.26 사건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궁정동 안가에서 육군본부로 자리를 옮겼다. 역사가들은 만약 육본이 아니라 남상에 있는 중정에 갔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만약 김재규 부장이 중정에 가서 정 총장을 인질로 잡고, 각료들을 불러서 계엄령을 선포한다면 권력의 정점은 ‘중정’에 있게 된다. 자연스럽게 보안사 역시 중정의 휘하에 놓이게 되면서 사실상 권력은 김재규 부장이 잡게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재규 부장은 중정 대신 육본을 택했다. 그 사이 김계원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최규하 국무총리와 정승화 총장에게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범인은 김재규 부장이라고 알린다. 그러자 정 총장은 자신의 휘아 헌병에게 김재규 부장을 체포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불러들인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면서 곧바로 계엄령이 선포됐는데 계엄이 선포된다는 것은 참모총장이 모든 권력을 쥐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수사권은 자연스럽게 보안사에 넘어가게 된다.

다시 말하면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대한 수사를 중정이 하는 것이 아니라 보안사가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재규 부장이 체포되면서 중정은 수장을 잃었다. 청와대 경호실 역시 차지철 실장이 저격되면서 수장을 잃었다.

전두환으로 권력 이동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면서 빠른 속도로 중정과 청와대 경호실 권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 당시 권력을 지탱해온 3대 권력기관이 전두환의 손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10월 28일 대중 앞에서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는 것이니 단순히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정점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사실상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총장 다음 권력은 자신이라는 것을 국민에게 알리는 중간수사결과 발표이다. 국민들로서는 그때까지 전두환의 존재를 몰랐다. 보안사령관이라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전두환이 12.12 쿠데타를 통해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고, 자신이 권력의 정점으로 향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 사람들이라면 전두환이 권력의 정점에 있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유신독재 시절 권력의 2인자로 김재규 부장과 차지철 실장 그리고 전두환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전두환을 김재규 무장과 차지철 실장을 견제하기 위한 인물로 생각했고, 보안사령관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하나회를 조직했다.

이런 하나회가 조직되는 것은 12.12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열쇠가 됐다. 당시 전두환 소장이 참모총장을 체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이 키운 2인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주현 기자 leejh@koreanews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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