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주년 특별기획】 하나회, 다시는 있어서 안될 역사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하나회, 다시는 있어서 안될 역사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1.11.03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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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10월 그날⑥] 그들은 어떻게 권력을 잡았고, 권력에서 멀어졌나

10월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는 ‘달(月)’이다. 우리 현대사의 굵직한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 10월에 몰렸으며, 그것이 1979년 10월에 이뤄졌다는 점이다.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을 비롯해서 부마민주항쟁, 그리고 10.26 사건까지 숨쉴 틈 없이 달려온 시기가 바로 1979년 10월이다. 1979년 10월이 우리 현대사에 주는 의미가 상당히 크다. 산업화의 시대에서 민주화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바로 1979년 10월이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뉴스투데이에서는 창간 10주년을 맞이해 1979년 10월 그날을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2011년 전두환씨 모습. (사진/뉴시스)
2011년 전두환씨 모습. (사진/뉴시스)

[한국뉴스투데이] 10.26 사건은 하나회가 전면에 나서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하나회는 대한민국 육사 11기생들이 주도로 비밀리에 결성했던 군대 내 사조직이다. 육군사관학교의 각 기수들이 내려오면서 주로 경상도 출신 장교들을 대상으로 3~4명씩 회원을 계속 모집했다. 10.26 사건을 계기로 전면에 나섰고, 12.12 쿠데타를 통해 신군부가 군대와 정권을 사실상 장악하면서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5.16 지지 시위서 출발

하나회는 1951년 육군사관학교 입학생 중 영남 출신 생도인 전두환, 최성택, 박병하, 노태우, 김복동 등 5명을 중심으로 조직한 것이 시초다. 1961년 말 전두환, 최성택, 백운택, 정호영, 손영길, 노태우, 권익현 등 육사 11기들을 중심으로 칠성회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하나회로 바뀌게 됐다.

하나회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5.16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전두환을 중심으로 육군사관학도들이 쿠데타 지지 시위를 벌였고, 이것이 박정희 당시 소장의 관심을 끌게 만들었다.

5.16 쿠데타가 성공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은 육사생도들의 지지 시위였다는 평가도 있다. 그만큼 군대 내에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천명했기 때문이다.

하나회는 1963년 7월 6일 이른바 ‘7.6 친위 쿠데타’를 통해 8기를 몰아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런데 박정희가 이들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면서 하나회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하나회 회원들은 군대 내 요직을 점거하면서 승진이나 자리 이동 때 선배가 후배를 추천하는 식으로 독점해 가기 시작했다. 이것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묵인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군대를 장악하기 위해서 하나회와 공생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다.

윤필용 사건으로 전두환이 두각

이런 하나회가 수면 위로 떠오른 사건은 바로 1973년 윤필용 사건이다.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하나회 조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에 대한 조사를 했다.

그 과정에서 윤필용은 한풀 꺾이게 되면서 하나회는 자연스럽게 전두환이 접수를 하게 된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두환에 대해 특별히 아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나회는 철저하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충성으로 이뤄졌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하나회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하면서 서로에 대해 ‘형님’ 등의 암호명으로 세를 과시했다.

유신 체제로 들어서면서 청와대 경호실과 중앙정보부가 권력 다툼을 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들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연스럽게 하나회에 대해 의존을 할 수밖에 없었고, 전두환을 이들의 권력 다툼의 견제 장치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0.26·12.12 통해 권력 전면에

이에 1979년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한다. 그리고 10.26 사건이 발생한다. 사실 10.26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하나회가 이처럼 완전히 전면에 나서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하나회는 단순히 경호실과 중정을 견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10.26 사건이 발생하면서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에서 합동수사본부장이 되면서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 다음의 권력서열을 받는다. 이는 하나회에게는 권력의 중심에 다가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하나회는 군의 주요 요직을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하는 12.12 쿠데타를 일으킨다.

12.12 쿠데타는 단순히 정승화 총장의 옷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회 즉 신군부가 권력의 전면에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군을 완전히 장악한 하나회는 전두환을 내세워 본격적으로 권력을 접수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시도는 5.17 쿠데타이다. 하지만 광주 시민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졌다.

신군부는 군홧발로 광주시민의 항쟁을 짓밟았고, 결국 권력을 장악하면서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5공 정권이 탄생했다. 5공 정권 내내 하나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지만 87년 민주화운동 이후 다소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노태우 정권에서도 다소 명맥을 유지하면서 국회의원 등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김영삼 하나회 척결

하지만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1993년 초 육사 31기생(1975년도 임관)들이 동기회장 선출을 두고 하나회와 비하나회로 분열되면서 양측이 한 선술집에서 맥주병을 깨면서 난투극을 벌였다.

이것이 계기가 됐는지 1993년 4월 2일 서울시 용산구 동빙고동 군인아파트에 익명의 군인에 의해 하나회 명단이 살포됐고, 군정 종식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김영삼 정부는 대대적인 하나회 숙청 작업이 진행됐다.

이때 언론은 하루아침에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묘사를 하기도 했다. 당시 국방장관도 경악할 정도로 전격적으로 하나회 해체 작업이 이뤄졌다. 하루아침에 하나회가 해체되면서 군대 내에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오늘날에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하나회 숙청은 잘된 개혁 정책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나회는 육사 36기부터 종식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청죽회, 만나회, 알자회, 나눔회 등 하나회와 비슷한 사조직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과거 하나회와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는 상황이다. 

하나회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진 역사 속 어두운 그림자이고, 앞으로도 발생해서는 안되는 역사이기도 하다.

이주현 기자 leejh@koreanews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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