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가 없다는 것
기대가 없다는 것
  • 정은경 방송작가
  • 승인 2021.11.05 10: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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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내 친구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와 절연을 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절연 당한 그 친구는 늘 약속 시간에 늦었고, 뭘 해줘도 고맙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친구로서 당연한 거 아냐?’라는 식으로 태도를 보였단다.

아무리 그래도 30년 지기 친구와 하루아침에 어떻게 절연할 수 있을까?
늦을 때마다 미안하다고는 하니 지금껏 참고, 참았는데 이번엔 폭발하고 만 것이다.

사건의 그 날도 늘 그렇듯 내 친구의 친구는 약속 시간에 늦었는데,
왜 늦었냐며, 일찍 좀 올 수 없냐며 화를 내던 내 친구에게
적반하장으로 좀 늦을 수도 있지 뭘 그러냐며 도리어 자기가 화를 냈단다.
결국, 그날 내 친구는 냉정하게 돌아서고 말았다.

가시나! 너 다시는 안 본다

평소 시간을 돈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매사에 똑 부러지는 내 친구의 성격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친구가 있었는지, 그 성격에 어떻게 그동안 참아왔는지 의아해했지만.
그 말을 듣는 나의 감상은. ‘그래도 너무 했네!’였다.

물론 나도 내 친구의 입장이라면 매번 화가 나고, 신경질도 나겠지만
굳이 면전에다 대고 안 만난다고까지 선언(?)을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냥 안 보고 말지! 속으로만 생각했을 텐데.

이런 내 반응이 못마땅했는지, 아니면 날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건지.
내가 자기처럼 행동을 하지 않는 건 기대가 없어서 그렇다고 했다.

기대? 내가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 그렇다고?
뭔가 좋은 말은 아닌 것 같은데도,
그리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 딱히 반박하지도 않았다.

나에게 기대란 이런 것이다.

얼마 전,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약속시간에 맞춰 나섰다.
점심시간에 맞춰 내가 그 친구 회사 근처로 가기로 했는데
문제는 그 약속을 일주일 전에 하고 그동안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던 것!

설마 그러진 않겠지만, 혹시 몰라
회사 앞에 도착하기 전 버스 안에서 뭐 먹으러 갈까?’ 톡을 보냈더니,
!!! 이럴 수가!!!
약속을 까맣게 잊고 이미 동료와 밥을 먹고 들어오는 길이라는 게 아닌가?

삽회/ 박상미
삽화/ 박상미

이때 드는 생각.
1) 어이가 없다. 황당하다.
2) 나를 어찌 보고 무시를 하나? 화남
3) 내가 그 친구에게 이거 밖에 안 되나? 초라함, 자괴감

머리에 스팀이 돌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때부터 전화는 계속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버스 안이라 그랬기도 했고, 또 받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안 받는 전화 대신에 계속 울리는 톡에는
이런저런 말을 쏟아냈지만, 그래도 2), 3) 번까지 얘기하지 않았다. 자존심은 지켰다.
어쩜 그럴 수 있냐며 어이없다고만 했다.
그리곤 싸늘하게. ‘알았다

2), 3) 번까지 얘기해봐야 말하는 내 자신만 초라해질 뿐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 친구가 나를 무시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그 친구의 자유가 아니던가?
왜 나를 초라하게 하냐고,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냐고 얘기해봐야!
진심이든 아니든 아니라는 말을 듣겠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고, 상처받은 다음이다.
그때 무슨 말을 듣는다고 치유가 될까? 이득도 되지 않는 말을 하고, 들을 바에는
차라리 스스로를 다독이는 수밖에.

그 일이 있은 후, 아주 나중에 다시 그 친구를 만났고, 그때 다시 한번 사과를 받았다.
그것으로 됐다. 더 이상 기대할 게 뭐가 있을까?
굳이 절연을 해서 서로 상처를 남길 필요도 없다.

절친이라면 이래야 한다, 가족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된다는
나만의 기준을 정하고, 기대하다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나만 상처를 받는다.

나에게 기대가 없다는 건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다기보다는 적당한 거리 두기.
그리고, 상처받지 않으려는 자기방어적 마음이다.

친구가 약속을 까맣게 잊은 사건 후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이제는 전날 한 약속이라도 출발하기 전에 꼭 확인 문자를 한다.
절친이든, 아니든 다시는 스스로 초라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상처받을 상황을 애초에 차단하기 위해
나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정은경 방송작가 pdirow@naver.com

정은경 방송작가

20여 년 동안 시사, 교양 분야의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다.
주요 프로그램으로 CBS <변상욱의 시사터치>, EBS <김민웅의 월드센터>, <생방송EBS FM스페셜> KBS <보고싶은얼굴, 그리운 목소리>, <월드투데이>, <라디오주치의> tbs <서울 속으로> 등 다수가 있고, 현재는 TBS <우리동네라디오>를 시민제작자와 함께 만들고 있다.
치열한 방송현장에서 일하면서 나만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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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자 2021-12-02 15:45:55
기대가 아예 없다기 보다는... 적당한 거리가 중요한것 같아요~ 작가님처럼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기에~ 이제는 '자기 합리화'인지는 몰라도 전 '내가 조금 손해보고 만다' 주의랍니다. 내 스스로 받는 스트레스가 은근 많더라구요^^ 남을 위한다기보다는 나를 위해서 그렇게 선택했답니다. 작가님도 스트레스 받지 말고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