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여 년 넘게 ‘붓 한 자루로 먹고 살아왔다’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저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누구나 소설 한 편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쓰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고, 전업 작가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등단해도 안정적인 직업으로 작가가 되는 길은 그리 녹록하지 않은 것 같다. 1995년 뉴욕도 예외는 아닌 듯.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작가 지망생의 좌충우돌 갈팡질팡 청춘 보고서다. 등단한 작가이지만 그것뿐이다.
작가가 되고 싶어서 청운의 꿈을 품고 뉴욕에 왔으나 정작 작가가 아닌 작가를 세일즈 하는 작가 에이전시 일을 할 줄이야. 작가의 꿈은 물 건너간 것처럼 조바심 나지만, 잠시 멈춰서 바라보면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아름답다.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 원제 My Salinger Year>는 마치 겨울 시즌을 겨냥한 영화처럼 요즘 감상하기에 안성맞춤인 영화다. 배경은 1995년 뉴욕의 가을이지만, 영화의 이야기는 어딘지 모르게 1990년대 대한민국 12월의 감성이 스며있다.
등단을 열망하는 문학 지망생들의 일상은 동서고금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대부분 작가 지망생은 글을 쓰고 응모하고 등단을 기다리며 글쓰기 외의 밥벌이를 한다. 어디 문학뿐이겠는가. 영화계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지난 9월 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국제경쟁 부문에서 <수프와 이데올로기>로 대상을 받은 재일교포 양영희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명색이 감독이지만 감독으로 먹고살지 못했다. 영화는 밥벌이가 안 되었다. 자괴감이 들었다”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지금은 세계적 감독의 반열에 있지만 봉준호 감독도 신인 시절이 있었고, 박찬욱 감독도 영화가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전엔 영화잡지에 잡문을 쓰던 시절이 있었다. 유독 예술가에게는 혹독한 시절이 있는 것 같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의 주인공 조안나(마가렛 퀄리)는 그 출발점에 서 있는 작가 지망생이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조안나 래코프가 뉴욕의 오래된 작가 에이전시 ‘해럴드 오버’에서 1년여간 일했던 경험을 엮은 도서 [마이 샐린저 이어(My Salinger Year)]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필리프 팔라도 감독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던 필리프 팔라도 감독은 한 서점에서 [마이 샐린저 이어]를 발견했고 영화화했다.
“책 속의 인물이 겪어나가는 불확실한 시기를 보며 공감이 되었어요.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시기잖아요. 뭐든지 할 수 있으면서도, 모든 게 아득해 보이는 때죠”라며 이야기 속 ‘조안나’ 캐릭터에 깊은 공감을 전했다. 작가의 꿈을 뒤로하고 누군가의 조수가 된 ‘조안나’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는 모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일, 연애, 우정, 꿈 등 마음대로 되는 일 하나 없이 모든 것이 불안정하지만 지나고 나니 그때 그 시절이 가장 빛나는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주인공 ‘조안나’역을 맡은 마가렛 퀄리는 독보적인 비주얼과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최근 할리우드에서 가장 기대되는 스타 중 한 명. 90년대 할리우드 스타 앤디 맥도웰의 딸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 주연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신스틸러로 활약한 마가렛 퀄리는 광기 어린 히피족 ‘푸시캣’ 연기로 배우로서 이름을 각인시켰다.
회사 CEO 마가렛 역은 시고니 위버가 맡았다. 1987년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록버스터 <에이리언>의 ‘리플리’ 역으로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 시고니 위버는 2009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에서 그레이스 박사 역을 맡아 단단한 연기를 선보였다. 아카데미 3회 노미네이트, 골든 글로브 2회 수상 영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지난 2020년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다. ‘조안나’는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지 않았지만, 샐린저에게 보낸 독자의 편지들을 꼼꼼히 읽으면서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를 이해해 간다. 그 과정이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그리고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싶어진다. 10대 그때의 친구들이 지금 내 옆에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