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 &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상실감을 마주하는 동서양의 온도 차이
‘피그’ &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상실감을 마주하는 동서양의 온도 차이
  • 곽은주 기자
  • 승인 2022.02.17 2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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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은 어디에 있을까

영화 <피그><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가족 혹은 반려견을 잃은 상실감과 슬픔을 다룬 영화다. 반려자를 잃은 슬픔이나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상실감을 겪지 않고야 어찌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든 인간은 시한부 인생을 산다. 어찌 인간뿐이겠나. 모든 생명체는 다 종말을 맞는데.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는데, 우리는 멀리 두고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더 황망한 슬픔을 겪는 것은 아닌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때때로 고아가 된 것 같다는 극단적인 고립감으로 표현된다. 하긴 인간은 다 고아가 아닌가.

니콜라스 케이지, '피그' 스틸 컷, (주)판시네마  제공
니콜라스 케이지, '피그' 스틸 컷, (주)판씨네마 제공

<피그, 원제: Pig>(2021)의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때의 슬픈 감정은 나이가 들어서도 없어지지 않았다. 부친을 잃은 상실감과 슬픔이 <피그>에도 슬그머니 끼어들었다고 한다. 감독의 이런 슬픔은 니콜라스 게이지가 연기한 에 고스란히 녹아내린다. ‘은 부인을 잃고 모든 세속적인 즐거움을 버리고 숲속에서 산다. 먹고 살기 위한 생계 수단으로 택한 업이 트러플(truffle)을 찾는 것.

트러플은 희귀한 버섯류의 일종으로 한국어로는 서양송로버섯이라고 일컫는다. 땅속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돼지나 개 같은 후각이 발달한 동물을 이용하여 파낸다. 고가로 매매되기 때문에 블랙 다이아몬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버섯이다.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작곡자 롯시니가 광적으로 좋아했던 버섯으로 특히 유명하다.

니콜라스 케이지, '피그' 스틸 컷, (주) 판씨네마 제공
니콜라스 케이지, '피그' 스틸 컷, (주)판씨네마 제공

은 암돼지 브랜드를 트러플을 채집하는 돼지로 훈련 시키고 마치 운명공동체의 가족처럼 단둘이서 숲속 오두막에서 산다. 생전에 부인의 육성 테이프를 듣는 것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일 뿐. 일상이 대자연에 일부처럼 숲속의 일원으로 산다.

느릿한 걸음으로 거구의 리콜라스 케이지가 오두막 근처를 움직일 때면, 흡사 숲속에 나무가 움직이는 것 같다. 마치 동화의 나라 거인처럼 쉽게 범접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그러나 극의 맥락을 설명하는 서사는 단지 구차한 영화적 장치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한 인간이 맞닥뜨린 상실의 슬픔이 어떤 것인지 오롯이 보여 줄 뿐이다. 때때로 거구의 등에서 뿜어 나오는 분노의 숨결은 맹수처럼 포효하지만, 뒤돌아서면 혼자만이 겪어야 하는 상실의 슬픔으로 등 뒤로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부인을 그리워하며 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회한에 잠긴 한 남자의 쓸쓸한 모습을 보노라면, 심연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욱! 하는 뜨거운 눈물이 올라온다.

<피그>서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영화에서 배우의 역할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인정하며 영화를 봤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이 장면에 대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네 의견을 들을게라며 함께 연기한 알렉스 울프에게 물으며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연기 앙상블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피그>는 단연코 니콜라스 케이지의 영화다.

닛츠 치세,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스틸 컷, (주)영화사 진진 제공
닛츠 치세,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스틸 컷, (주)영화사 진진 제공

아울러 하시모토 나오키 감독의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원제: Show Me the Way to the Station>(2019)의 주인공 닛츠 치세 또한 니콜라스 케이지 못지않은 배우의 존재감으로 극을 빛낸다.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원작 단편 소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2004)를 각색한 영화다. 원작 소설가인 이주인 시즈카는 영화 속 이야기처럼, 해양 사고로 어렸을 때 하나뿐인 동생을 잃었다고 한다. 이주인 시즈카는 이별하는 건 슬프지만, 슬픔은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이별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어찌 피할 수 있으리.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슬픔희망이 동의어인 것처럼 느껴지는 마술을 경험하게 된다. 닛츠 치세가 연기한 8세 소녀 사야카의 슬픔이 희망으로 돋아나는 지점에는 단연코 닛츠 치세의 사랑스러운 연기가 큰 몫을 한다. 닛츠 치세의 형형할 수 없는 천진함과 영리함이 환하고 맑아서 슬픔조차도 기쁨으로 승화시킨다. 마치 이 세상에는 추하고 더러운 것은 없는 것처럼 평온과 따스함을 준다. 보드라운 의 감촉 같다.

닛츠 치세, 오이다 요시,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스틸 컷, (주)영화사 진진 제공
닛츠 치세, 오이다 요시,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스틸 컷, (주)영화사 진진 제공

니콜라스 케이지가 연기한 과 닛츠 치세가 연기한 사야카의 슬픔은 바로 우리가 겪은(앞으로 겪을) 슬픔이기에 더 깊고 더 슬프게 다가온다. 일찍 아버지를 잃은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의 슬픔이고, 어린 동생을 잃은 이주인 시즈카의 슬픔이고, 바로 내가 마주한 슬픔이다.

곽은주 기자 cineeun6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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