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랍게’... 전쟁은 없어야 된데이
‘보드랍게’... 전쟁은 없어야 된데이
  • 곽은주 기자
  • 승인 2022.02.27 1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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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하나 죽어가 나라가 잘되면 좋겠다

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쓰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할매, 순악씨”. 본명은 김순악(1928~2010). 그녀는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보통 사람은 상상도 못 할 18개의 이름으로 불렸을까.

고 김순악, '보드랍게' 스틸 컷, (주)인디플러그 제공
(고)김순악, '보드랍게' 스틸 컷, (주)인디플러그 제공

고 김순악은 경산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났다. 부친은 순옥이라 이름을 지었지만, ‘자는 양반들 자식에게만 쓰는 이름이라고 호적 담당 면서기가 자를 못 쓰게 해서 부친은 '옥'자를 '악'자로 바꿨다고 한다그녀 나이 16세가 되던 해에 마을에는 처녀공출로 뒤숭숭했다. 행여 딸이 처녀공출로 차출될까 봐 노심초사하던 부친은 마침 마을 사람이 대구 실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딸을 대구로 보냈다. 그때 아버지를 본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중국 장가구에 위치한 위안소에서 하루에 많게는 30~40명의 일본 군인을 받았다. 아랫도리가 헐어서 아팠으나 치료조차 받을 수 없었다. 휴일이면 일본군은 줄을 서서 기다리며 밀려들어 왔다.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일본 패망 후 열여덟의 나이로 서울에 도착했으나 차마 고향 집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유곽으로 술장사로 떠돌게 된다. 그 후로도 양키 물건 장사, 식모를 하며 먹고살 수밖에 없었던 고단한 인생이었다. 사는 것이 참으로 막막하여 자살까지 결심하고 철길에서 기차를 기다렸으나, 차마 죽지를 못했다. 뒤돌아서며 흘렸을 그녀의 뜨거운 눈물을 누군들 짐작하겠나.

'보드랍게' 스틸 컷, (주)인디플러그 제공
'보드랍게' 스틸 컷, (주)인디플러그 제공

전쟁은 없어야 된데이.

꽃을 좋아하는 천생 여자 순악 씨. 차분히 앉아서 꽃을 부치는 압화 작업할 때는 세상 평화롭다는 그녀. ‘평화라는 낱말을 가장 좋아한 할머니. 전쟁은 없어야 된데이~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던 그녀에게 큰아들이 군대 제대를 며칠 앞두고 월남전에 자원했을 때는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술이 아니면 잠도 못 자는데, 술도 끊고 아들을 위한 기도로 그 암흑 같은 시절을 건넜다.

넘의 집살이를 15년 했다아이구 그랬구나! 하이구 참 애먹었다보드랍게 말해주는 사람 하나 없는 천대받은 인생으로 인간 대접을 받아 보지 못했던 그녀지만, 식모살이로 한 푼 두 푼 차곡차곡 모아 온 돈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지정되면서 다달이 보조받았던 생활비를 허투루 쓰지 않았다. 20101"내가 죽어도 내게 일어났던 일은 잊지 말아 달라"고 유언하며 위안부역사관건립을 위해 5400여만 원을 남겼다. 유언으로 돈을 줬으니 위안부역사관을 안 지을 수 없었다. 김순악 할머니의 유산이 대구 위안부역사관 건립에 씨앗이 됐다. 유산의 반은 소년소녀가장의 장학후원금으로 기탁했다. 배우지 못해서 겪어야 했던 설움과 한을 대물림할 수 없었다는 평소 할머니의 의지는 그렇게 사회에 환원됐다.

나는 꽃이 참 좋아. 꽃을 선물로 받는 사람은 얼마나 좋겠노꽃 선물 받는 사람을 무척 부러워하던 할머니. 그녀는 죽어서 평의 꽃으로 가난한 소년소녀가장의 희망의 꽃으로 피었다.

'보드랍게' 스틸 컷, (주)인디플러그 제공
'보드랍게' 스틸 컷, (주)인디플러그 제공

다큐멘터리 <보드랍게>를 연출한 박문칠 감독은 김순악이 남긴 생애 구술과 활동가들의 인터뷰를 통해 위안부로 인한 피해가 전쟁 당시에 끝난 게 아니라 이후 생애 전반에 걸쳐 계속됐다는 데 주목했고, 피해자들이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작품의 방향성을 잡았다고 한다. 주인공 김순악을 단순한 피해자프레임으로만 가두지 않고, 삶을 입체적이고 통시적으로 조명했다. ‘아무도 속을 모를순악 씨의 삶을 함부로 단정하거나 좌지우지하지 않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김순악을 구축해냈다. ’위안부이슈는 과거지사가 아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21회 전주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상12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아름다운 기러기상을 수상했다.

곽은주 기자 cineeun6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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