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수고는 없다
헛수고는 없다
  • 정은경 방송작가
  • 승인 2022.03.18 10: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삽화/ 박상미
삽화/ 박상미

그런 날이 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축축 처지는 그런 날…
이번 주 비가 자주 와서 그런지 축축한 공기의 무게가 몸을 짓누르는 듯하다. 

오늘 아침은 더욱 그랬다. 몸은 무겁고, 의욕은 1도 생기지 않았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냥 뭉개고 싶은 날이다. 마치 시체놀이를 하듯….

하지만 어디 시체놀이만 하면서 살 수 있는 처지던가? 그래도 할 일은 있고, 해야 할 일은 하면서 하루를 살아야기에 어떻게 해서든 무기력한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를 썼다. 
그때, 두꺼운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읽으면 좋겠지만, 읽기 시작하면 잠이 올 것 같은, 베개로 딱 적당할 것 같은 명작고전!! 
지금의 무기력한 상황에서 읽는 건 오히려 더 역효과가 날 것 같으니 그 고전을 읽는 대신, 무작정 베껴보기로 했다. 

가끔 글을 써야 하는데 잘 써지지 않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베낀 적이 있었다. 비록 기계적으로 베끼는 거지만 자판 위에서 손이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걸 보면 마치 내 글을 쭉쭉 써나가는 착각이 들어 기분이 꽤 괜찮았다.

​이번에도 그런 기대를 하며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10분쯤 베끼기 시작했을까? 머리에 책 내용이 들어오는 대신,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막 떠오르기 시작하더니 그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이다 보니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 걸까?

당장 베끼기를 중단하고,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처리해나가기 시작했다. 무기력은 이미 나의 몸에서 빠져나간 상태다. 원고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게스트에게 원고를 보내고, 섭외할 사람들 명단을 보며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아마 무기력함이 있었다면 시간만 질질 끌고, 막판에야 부랴부랴, 대충대충 끝냈을 일을 의욕을 가지고 신나게 일을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일을 끝내고 나니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극히 단순한 책 베끼기는 가끔 무료함을 달래려고, 기분 전환을 하려고 했을 뿐, 그동안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사실 책을 베낀다는 건 얼마나 단순한 일인가? 너무나 단순한 일이기에 그 일에 의미를 두기도 뭐하고, 뭐 하나 남지 않은 그야말로 시간 낭비, 헛수고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무기력한 상황에서 의욕이 생기게 할 수도 있다니….

어느 일본 영화에서 남의 책을 계속 컴퓨터로 입력하는 작업을 했던 한 주인공이 어느 날 자신의 훌륭한 책을 썼다는 얘기가 있다. 물론, 영화 속의 가상 이야기긴 하지만 실제로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글을 쓰는 작가 중엔 남의 작품을 수기로 하나하나 베끼면서 트레이닝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미 책 베끼기는 분명 헛수고가 아니라 많은 연습방법 중의 하나가 되어있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너무나 단순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마음이다. 지금하고 있는 일이 아무 의미 없는 헛수고가 아니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 그 마음과 확신만 있다며, 그 마음과 확신으로 꾸준하게 한다면 나만의 노하우가 되고, 분명 그 헛수고에서 뭔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헛수고는 없다. 세상에 의미가 없는 것이 어디 있으랴? 하다못해 다 타버린 연탄재도 훌륭한 시의 소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을….

정은경 방송작가 pdirow@naver.com

정은경 방송작가

20여 년 동안 시사, 교양 분야의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다.
주요 프로그램으로 CBS <변상욱의 시사터치>, EBS <김민웅의 월드센터>, <생방송EBS FM스페셜> KBS <보고싶은얼굴, 그리운 목소리>, <월드투데이>, <라디오주치의> tbs <서울 속으로> 등 다수가 있고, 현재는 TBS <우리동네라디오>를 시민제작자와 함께 만들고 있다.
치열한 방송현장에서 일하면서 나만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정미자 2022-03-26 14:45:49
글을 읽으면서 중요한 것을 알았네요. 헛수고는 없다는 말! 참 용기를 주는 말인 듯 싶어요. 그리고 또 무료하거나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 남의 책을 베끼는 걸 난 왜 여태 알지 못했는지... 아 하! 하면서 읽었습니다. 역시~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