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게으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게으름 
  • 정은경 방송작가
  • 승인 2022.04.15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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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박상미
삽화/ 박상미

열심히 일하던 한 방송작가가 있었다. 
밤새는 건 기본. 섭외를 하고 원고를 쓰면 끝나는 일을 계속해서 소식을 들여다보고는 
바뀔 수 있는 건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그 친구는 나보다 두, 세 살 어린 친구였는데, 
옆에서 보면 어떻게 저렇게 일에 푹 파묻혀서 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정말 이 일을 좋아하는구나. 이 일이 그 친구의 천직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더니 덜컥 일을 그만뒀다. 
그렇게 좋아하던 일을 그만두는 것이 섭섭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뇨, 일은 싫은데 아무 일도 없이 그냥 놀면 이상하게들 보잖아요. 그래서 열심히 한 거예요. 이제 임신을 했으니 공.식.적.으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너무 좋아요.”

헉… 일을 좋아해서 열심히 한 게 아니었다니. 뭔가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일을 좋아하지 않는 것치고는 너무 일을 잘해왔던 친구였는데… 
임신을 핑계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 아주 오래된 사건(?)이 오늘 문득 떠올랐다. 
마치 내 귀에 박혀있는 그 공.식.적.이라는 말 때문에…
나도 그 공식적인 것을 핑계 삼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최근에 코로나19에 감염이 됐었다. 그동안 잘도 비켜나는가 싶었는데, 감염된 사람과 밥을 먹고 난 뒤 바로 양성 판정을 받게 됐다. 
다행히 남들이 말하는 ‘목에 밤송이가 있는 것 같다’, ‘바늘 100개를 삼키는 것 같다’는 것처럼 증상이 지독하진 않았지만, 양성은 양성. 일주일간은 좋든 싫든 자가격리를 해야 할 상황이 찾아왔다.  

그동안 바쁘게 해왔던 모든 일이 올 스톱이 되었다. 일과 관련한 회의도 취소하고, 한두 개 잡혀있었던 강의도 취소했다. 아주 최소한으로 원고만 겨우 써서 보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고 보니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이들도 있을 테고, 또 나를 대신에 일을 더 많이 하는 이도 분명 있을 텐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편치 않은 마음은 잠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은 물론이고, 체력을 위해 시작했던 운동, 그렇게 해도 습관이 되거나 좋아지지 않는 운동도 쉬었고, 뭔가 의무적으로 보던 책도 내려놓고, 하루도 빼먹지 않았던 영어공부도 중단하고, 청소와 빨래도 중단…

왜? 나는 지금 공.식.적.으로 쉬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던가. 지금 이 시간은 옛날 그 후배 작가처럼 모든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다. 

사실… 생방송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는 휴가를 간다고 해도 정말 휴가처럼 쓰질 못했다. 휴가를 가서도 늘 노트북을 챙겼고, 그곳에서 매일 같은 시간 원고를 써서 보내야 했으니 그게 어디 휴가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지난 20여 년 동안 습관이 돼 버린 걸까? 나에겐 스스로 일을 내려놓는다는 건 그 어떤 일보다 힘든 일이었다. 스트레스를 받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해결해야 할 것이기에 피할 수 없었다. 세상은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갈 수 있는데 그동안 난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코로나19에 감염이 되면서, 자가격리를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때로는 열심히 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잠시 쉬어도 대세에는 크게 지장이 없고, 세상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간다는 것을…

코로나19로 체력은 떨어지고 몸은 조금 힘들었지만, 마음은 가볍다. 
누군가 나를 보며 나태하다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더라도 난 당당하다. 
왜? 공식적으로 게으름을 인정을 받았으니까….

정은경 방송작가 pdirow@naver.com

정은경 방송작가

20여 년 동안 시사, 교양 분야의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다.
주요 프로그램으로 CBS <변상욱의 시사터치>, EBS <김민웅의 월드센터>, <생방송EBS FM스페셜> KBS <보고싶은얼굴, 그리운 목소리>, <월드투데이>, <라디오주치의> tbs <서울 속으로> 등 다수가 있고, 현재는 TBS <우리동네라디오>를 시민제작자와 함께 만들고 있다.
치열한 방송현장에서 일하면서 나만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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