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우울했었다.
의욕은커녕 그날 해야 하는 일들만 겨우 해치웠다.
친구들을 만나도 별로 신나지 않았고, 하고 싶은 것도 하나 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마음의 병은 신체로까지 나타났다.
뭘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고, 가슴은 답답하고, 속이 쓰렸다.
신체로 나타나는 병은 다시 마음으로 이어져 의욕은 더욱 없어졌고, 악순환은 계속됐다.
그 누구는 경증 우울증이라고 했다.
일하면서 생기는 스트레스 때문인 줄 알았다.
최근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일을 하게 됐는데,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적지 않은 스트레스였다. 때문에 그들을 만나기가 무엇보다 싫었고, 그들이 무슨 말을 하면 반감부터 가지게 됐다. 나의 이유가 그들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껏 일하면서 마음 맞지 않는 사람들을 만난 게 어디 한 둘인가?
아니다. 나의 경증 우울증은 그들로부터 온 게 아니었다.
얼마 전 알았다. 나의 문제는 부러움에서 왔다는 걸.
내가 아는 단란한 4인 가족이 있다.
부부는 입양한 아이나 친딸 할 것 없이 똑같이 사랑을 주고, 남편은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는 아내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준다. 아내 역시 남편의 배려에 지극히 고마워한다.
난 지금껏 이들 가족처럼 웃음이 끊이지 않는 이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 넉넉하지는 않지만 걱정보다는 늘 행복이 가득한 가족이다.
‘아, 소소한 행복이 이런 거구나’하며 그들 가족을 참 예뻐했다.
그런데, 난 그들 가족을 예쁘게만 본 게 아니라 어느 샌가 부러워하고 있었다.
‘저렇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저렇게 살면 좋겠다.’
나의 여건과 상황이 이미 4인 가족이 될 수 없어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한데도 막연하게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루어지기 힘든 꿈을 꾸면서 실현되지 못한 현실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
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방송작가라는 일이 시들해졌을 때, 내 친구들은 경력을 쌓아 부장이 되고, 이사가 되고, 억대 연봉을 받는 걸 보며 한때 자괴감에 빠졌었다. 그들과 내가 다른 건 없는데…….
나는 늘 제자리에 있는데 그들은 ‘발전’하는 것 같았다. 부러웠다.
하지만 난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있었다. 매일매일 출퇴근하는 걸 견딜 수 없기에 프리랜서를 택한 것인데, 이제 와서 그들의 직급을 부러워하다니……. 만약에 지금 누가 억대 연봉을 줄테니 직장을 다니라고 한다면 자신없어하며 못한다고 할 것을..
나의 경증 우울증은 할 수 없는 것과 될 수 없는 것을 부러워한 것이 원인이었다.
어느 날 그것을 인정하자마자 나의 병(?)은 깨끗이 나았다. 병이 낫자마다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훨씬 줄어들었다.
흔히,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한다.
부러움이 발전의 동력이 되어 어제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들 수 있다면
그 부러움은 긍정의 부러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의 현실과 상황에선 이루어지기 힘든 것들을 부러워하는 것이니
마음의 병이 생기고 신체의 병이 생길 수밖에.
이제부터 지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져봐서 아는 데 기분만 상한다.
남을 부러워하며 내 처지를 비관하기엔 내 몸과 마음만 상한다.
이기고 싶다면, ‘이 세상에 내가 최고요, 지금 나의 상황이 가장 좋다’고 마음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