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트랜스젠더 인권 변호사’ 박한희 변호사를 만나다
【인터뷰】 ‘트랜스젠더 인권 변호사’ 박한희 변호사를 만나다
  • 정한별 기자
  • 승인 2022.08.31 17: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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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알려지면 인생이 끝날 거란 공포감 있었지만
커밍아웃 후로도 잘 살아가는 사례들 접하며 변화해

‘도저히 이렇게는 더 못 살겠다’는 절박함으로 커밍아웃
지지 속 인권 변호사 활동 시작...희망 주는 선례 되고파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의 사무실이 위치한 서울 은평구의 혁신파크에서 박한희 변호사를 만났다. (사진/한국뉴스투데이)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의 사무실이 위치한 서울 은평구의 혁신파크에서 박한희 변호사를 만났다. (사진/한국뉴스투데이)

[한국뉴스투데이] 지난 2020년 숙명여대 법학과에 합격한 한 트랜스젠더 학생이 박한희 변호사를 롤모델로 꼽으면서, 박한희 변호사는 ‘국내에서 최초로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 변호사’라는 수식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해당 학생은 숙명여대 재학생들의 거센 입학 반대 끝에 입학을 포기했지만, “혐오의 목소리가 커 보이지만 현실에선 편견 없이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박한희 변호사의 위로에 용기를 얻었다고 밝혔다. 커밍아웃(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을 벼랑에서 떨어지는 일처럼 여겼던 박한희 변호사가 ‘최초로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 변호사’가 되고, 또 다른 이의 희망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내가 아닌 존재로 살아가기

‘최초로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 변호사’라는 수식을 받아 온 박한희 변호사의 첫 커밍아웃은 30살에 이뤄졌다. 정체성을 늦게 깨달아서는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을 희미하게나마 감지하고 있었지만, 정보가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러한 정체성이 알려지면 인생이 끝장날 거라는 공포감이 있었다. 그런 공포감은 성인이 되고 난 후로도 이어졌다.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알려진 탓에 오래 일해온 업계를 떠나야 했던 사람의 이야기는 박한희 변호사의 뇌리에 깊게 박혔다.

다만 정보가 많지 않았던 어릴 때와 달리 포항공과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진학한 후로는 트랜스젠더에 관한 정보를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서울에 올라가 크로스드레싱(다른 성별의 옷을 입는 일) 가게를 찾는 날들도 있었다. 다른 트랜스젠더들을 만나기도 했고 여성적인 옷들을 입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기숙사로 다시 돌아오고 나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생활이 없는 전원 합숙 생활에서는 정체성에 관련된 고민조차 하기 쉽지 않았다.

“기숙사 생활이 너무 힘들어져서 3·4학년에 들어서는 우울증도 심하게 앓았어요. 말도 거의 안 했고요. 딱 봐도 상태가 안 좋은 애로 다녔죠. 미래를 그리기는커녕 30대를 넘겨서 살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박한희 변호사는 로봇 공학 박사가 되겠다는 목표가 있었지만, 먼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면서 박사 학위를 따겠다는 생각도 접었다. 

대신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많은 서울에 가서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기계공학과를 졸업해 취업할 수 있는 대부분의 기업들은 비수도권에 있었지만, 삼성엔지니어링은 서울 본사 외에 다른 지역의 지사가 없었다. 그 이유 하나로 삼성엔지니어링에 취직했고, 서울에서 자취하겠다는 목표를 이뤘다.

그러나 남성 직원이 대부분인 회사에서 남성 양복을 입고 남성적 규범 속에서 생활하는 일 역시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언제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이 알려질지 모르고, 정체성이 알려지면 얼마나 일을 잘 해왔든 상관없이 잘릴 수 있다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에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잘릴 일이 없는 전문직 중 고민한 끝에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희망을만드는법 사무실에서 박한희 변호사가 인터뷰에 답하고 있다. (사진/한국뉴스투데이)
희망을만드는법 사무실에서 박한희 변호사가 인터뷰에 답하고 있다. (사진/한국뉴스투데이)

벽장 밖으로 나오다

이에 2013년, 박한희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했다.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는 사실을 스스로는 받아들인 상태였지만 평생 그래왔듯 드러내진 않은 채였다. 결단은 아주 사소한 순간에 이뤄졌다. 수업을 들으러 간 강의실에서, 다른 학생들로부터 ‘오빠’나 ‘형’이란 호칭을 듣는 순간 도저히 이대로는 더 살 수 없다는 감각, 한계에 다다랐다는 느낌이 강렬해졌다.

그 길로 박한희 변호사는 강의실을 빠져나와 휴학 신청을 했다. ‘30년간 정체성을 숨긴 채 살았는데, 30년을 더 이러고 살 순 없다, 해보고 안 되면 깔끔하게 떠나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금씩 커밍아웃을 준비했다. 커밍아웃 후로도 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례를 접하면서, 여태 가졌던 두려움이 사실은 실체가 없는 것일지 모른다는 희망도 작게나마 자라 있었다.

복학 후 박한희 변호사는 먼저 친하게 지내던 조원들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학회 전체에 커밍아웃하기 위한 일종의 사전작업이었다. “학회장에게 특별 보고 안건이 있으니 학회 막바지에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교단으로 나가 ‘나 트랜스젠더다,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 예전처럼 대해주면 좋겠다’고 했죠. 미리 얘기해둔 친구들이 눈치껏 박수쳐주더라고요. (웃음) 그렇게 다들 박수쳐 줬고, 이후로도 부정적인 반응은 딱히 없었어요.”

커밍아웃 이후로도 탈 없이 학교 생활을 이어간 끝에 박한희 변호사는 2017년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소수자 문제를 주로 다루는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이하 희망법)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저는 시민단체나 학생운동을 했던 경험이 없었는데, 인권운동을 접해보니 제가 참 잘 맞더라고요. 기획하고, 집회 현장에 나가서 구호 외치고, 사람들 만나 뒤풀이하는 그런 것들이 다 재밌었어요. 변호사 업무만 했다면 소송 안에서만 활동했을 텐데, 소송 밖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 배우는 게 많아요.”

또 희망법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오픈리(정체성을 전면에 공개하는 성소수자)가 됐다. “어차피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활동할 수밖에 없다면 매번 번거롭게 커밍아웃하느니 그냥 다 공개해버리자는 생각이었어요. 하리수 씨 외엔 알려진 트랜스젠더가 많이 없으니 다른 직업군을 보여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하고 싶은 말을 모아서 2017년에 경향신문이랑 기획 인터뷰를 냈어요.”

지난 3월 코로나19인권대응네트워크의 주최로 진행된 코로나19 대확산 관련 전향적 해법 요구 기자회견에서 박한희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박한희 변호사 제공)
지난 3월 코로나19인권대응네트워크의 주최로 진행된 코로나19 대확산 관련 전향적 해법 요구 기자회견에서 박한희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박한희 변호사 제공)

그려지지 않던 미래의 등장

희망법에서 근무하는 지난 5년간 박한희 변호사는 ▲성별 정정 성기 수술 요건 관련 소송 ▲동대문구의 퀴어여성네트워크 체육관 대관 신청 부당 취소 소송 ▲성소수자 축복 기도한 이동환 목사의 감리교 재판 회부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기념대회 대통령집무실 앞 행진 금지통고 취소소송 등 숱한 사건들을 도맡아 왔다. 트랜스젠더나 성소수자에 관련된 이슈가 터질 때면 박한희 변호사를 찾는 언론이 많아 인터뷰에 응하는 일도 잦다.

이에 자신의 이미지가 곧 트랜스젠더의 이미지가 된다는 부담감도 무겁다. “알려진 트랜스젠더가 많이 없다 보니 제가 보여준 얼굴 하나가 누군가에겐 살면서 본 유일한 트랜스젠더일 수도 있잖아요. 제가 가진 특징들이 하나의 개성으로 이해되기보단 트랜스젠더의 특징으로 여겨지질까봐 걱정스러울 때가 있죠. 더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양지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그럼에도 커밍아웃 이후의 미래를 그릴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박한희 변호사가 커밍아웃 이후로도 잘 지내는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냈듯이, 잘 지내는 한 명의 트랜스젠더로 사람들 앞에 나서고 또 보이는 일이 박한희 변호사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지금처럼 인권 활동하면서 가능한 한 힘 닿는 데까지 해보고 싶어요. 저한테 보람을 많이 주는 일이고 의미도 커요.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게 아닌 것처럼 의제들도 계속 있을 거고요. 물론 늙으면 시골 가서 조용히 살고 싶죠. (웃음) 근데 늙어서도 인터뷰 제안이 온다면 응할 것 같아요. 성소수자들이 하나같이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고 말하잖아요. 외국에는 몇십 년씩 트랜스젠더로 활동하신 분이 노인 되어서 강연도 하고 그러지만 한국에는 그런 사례가 없었으니까요. 한국에서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정한별 기자 hanbyeol.oab@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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