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잘된 거야’... 이젠, 죽고 싶다
‘다 잘된 거야’... 이젠, 죽고 싶다
  • 곽은주 기자
  • 승인 2022.09.17 16: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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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있어야 비로소 삶이 완성된다

영화 <다 잘된 거야>는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엠마뉘엘 베르네임의 동명 소설 다 잘된 거야(2013)가 원작이다. 엠마뉘엘은 부친에 존엄사를 글로 쓴다는 것이 배신 같아서 처음에는 글 쓸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보고 싶은 욕망에서 이 작품을 쓰게 됐다고 했다. 자전소설 다 잘된 거야출판 이후 엠마뉘엘은 2017년 세상을 떠났다. 작가와 오랜 친구이자 시나리오 작업 파트너였던 프랑수아 오종 감독은 엠마뉘엘을 추억하며 그녀의 소설을 영화화했다. <다 잘된 거야, 원제: Tout s’est bien passé영제: Everything Went Fine>(2021)는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21번째 영화다.

'다 잘된 거야' 스틸컷, 왼족부터 둘째 딸 파스칼 역의 '제랄딘 팔리아스', 쳇째 딸 엠마뉘엘 역의 '소피 마르소',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
'다 잘된 거야' 스틸컷, 왼쪽부터 둘째 딸 파스칼 역의 '제랄딘 팔리아스', 쳇째 딸 엠마뉘엘 역의 '소피 마르소',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

삶이란 항상 행복할 수 없다. 삶 그 자체가 거룩하고 축복이다. 유대인들은 건배할 때 무언가를 위한 삶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축복한다!'고 한다. 행복하든 불행하든 오직 살아 있는 것이 축복이므로.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태어나는 것은 선택할 수 없어도, 죽음만큼은 스스로 선택하고 싶어 한다. 과연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작가 엠마뉘엘’(소피 마르소)의 부친 앙드레’(앙드레 뒤솔리에)는 뇌졸중으로 신체 오른쪽이 마비된다. 85세의 나이(소설에서는 89세로 묘사됐다).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한 부친은 딸 엠마뉘엘에게 자살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한다. 아주 간절히.

"나는 이제 움직일 수가 없고, 정상적인 삶의 아주 기본적인 동작도 할 수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누릴 수가 없다. 전혀. 나는 이런 상태로 계속 지내고 싶지 않아. 너무 고단할 뿐이야"라며마음이 시키는 대로 결단한 것인가? 부친의 결단은 요지부동 완강하다.

프랑스는 2015년 레오네티 법안 통과로 치료를 중단하여 죽도록 내버려 두는 소극적 안락사'가 합법화되었다. 그러나 죽음을 위한 독극물을 투여하는 '적극적 안락사'는 여전히 허용되지 않는다.

'다 잘된 거야' 스틸컷, 부친 앙드레 역의 '앙드레 뒤솔리에', ㈜더쿱디스트리뷰션
'다 잘된 거야' 스틸컷, 부친 앙드레 역의 '앙드레 뒤솔리에', ㈜더쿱디스트리뷰션

영화 속 앙드레처럼, 실제로 지난 913일 스스로에 뜻에 따라 의료진 도움을 받은 조력존엄사 방식으로 숨을 거둔 프랑스 누벨바그(Nouvelle Vague·'새로운 물결')의 기수였던 장뤼크 고다르 감독의 사인이 '조력존엄사(assisted suicide)', 합법적 안락사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와 스위스 이중국적자인 고다르는 스위스에서 의사의 조력을 받아 약물을 투여하여 숨을 거뒀다. 프랑스에서는 조력존엄사는 금지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동일한 의료 행위임에도 가치나 관점에 따라 안락사, 존엄사의 용어가 달라지면서 혼선이 생긴다. 의료계에서 쓰는 용어와 국회나 공청회에서 쓰는 용어에 대한 정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존엄사안락사에 대한 용어조차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다.

조력존엄사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허용되는 '연명치료 중단'과는 다르다. 연명치료 중단은 말기 환자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하는 인공호흡기 착용, 심폐소생술 등을 중단해 죽음을 맞도록 하는 '소극적 존엄사'. 반면 조력존엄사는 의료진이 말기 환자에게 약물을 처방하되, 환자 스스로 그 약물을 복용 또는 투약해 죽음에 이르는 보다 적극적인 존엄사를 가리킨다. 의사가 직접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안락사와도 차이가 있다.

'다 잘된 거야' 스틸컷, 첫째 딸 '소피 마르소'와 엄머 클로드 역의 '샬롯 램플링',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
'다 잘된 거야' 스틸컷, 첫째 딸 '소피 마르소'와 엄마 클로드 역의 '샬롯 램플링',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소설 다 잘된 거야을 읽었다. 작가는 영화화를 예견했던 것일까? 소설은 아주 간결하다. 마치 시나리오를 읽는 것처럼, 영화의 이미지들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어서 아주 술술 쉽게 읽어진다. 그런데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나면 생각이 깊어 진다. 술술 쉽게 읽은 문장들 속에는 어느덧 울컥한 가을이 열린다. 9월의 밤하늘에 서서히 사위어 끝내 모습을 감추는 보름달처럼, 실바람에 마냥 흔들리는 들판의 개망초의 흔들림처럼 인생이 무상하게 흔들려 보였다. 이유 없이 눈물이 왈칵 흘렀다. 산다는 것이 참 덧없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영화와 소설과 현실이 우주라는 시공간에서 한 덩어리의 물체에 불과 한 것처럼 느껴진다.

엄마의 죽음으로 나는 허망해졌어라는 부친 앙드레의 회한의 말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법적인 문제로 자살하러 가는 부친과 동행하지 못한 딸 엠마뉘엘이 부친의 임종 소식을 전화로 들으며 흐르는 눈물에 함께 눈앞이 흐려졌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삶에는 죽음이 반드시 필요하고, 죽음이 있어야 비로소 삶이 완성된다는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죽음에 대한 해석은 얼마나 명쾌하고 아름다운가. ‘다 잘된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을까?

곽은주 기자 cineeun6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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