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출범 후 스님들과 현장마다 자리
성소수자 차별 체감 후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도 참여
“눈에 보이는 모습 따라 차별 말라는 것이 부처님 정신”
[한국뉴스투데이] 올여름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제23회 서울퀴어퍼레이드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부스도 마련돼 있었다. 이날 스님들은 축제 참여자들에게 ‘차별 없는 세상, 우리가 부처님’ 글귀가 적힌 부채를 나눠줬고, 무지개를 닮은 오색 실을 성소수자들의 손목에 걸어주기도 했다. 성소수자 인권 관련 현장 외에도 사회적 변화를 촉구하는 집회나 행사 등지에서 스님들이 함께 하는 풍경은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게 됐다.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 곁에 함께 하겠다는 뜻으로 모인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의 스님들이 늘 현장을 찾아 지키기 때문이다. 10년 전 사회노동위원회 출범부터 스님들과 함께 해 온 양한웅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집행위원장(이하 위원장)을 만났다.
부처님 정신 따라 노동운동가가 되다
양한웅 위원장은 본래 스님이 되려던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모태 불교 신자로 절에 다니며 자랐던 양한웅 위원장은 20대에 이르러 출가를 꿈꿨다. 민주화 운동으로 세상이 시끄럽던 시절에도 부처님 말씀 속에 길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에 입학했다가 우연히 아내를 만났고, 결혼에 이르면서 절 대신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이하 한국통신)에 입사했다.
그런데 입사 이후 양한웅 위원장은 동료들의 열악한 환경을 목격하게 된다. 위험한 일을 도맡는 현장 노동자들은 끔찍한 더위와 추위 속에서 제대로 쉬지도,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도 못했다. “소위 블루칼라에 대한 차별을 목격한 거죠. 2500년 전에 사셨던 부처님도 어떤 이유로든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셨어요. 여기에 눈 감는 것은 부처님 정신에 어긋난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저는 학생운동도 민주화 운동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 뭘 해야 할지 몰랐어요. 회사 선배들에게 무작정 물었더니 노동조합을 하면 된다더라고요.”
그러나 당시 한국통신에는 제대로 된 노조가 없었다. “소위 말하는 어용 노조가 하나 있었어요. 노동자의 권익이 아니라 회사의 이익을 대변하는 곳이니 사실상 노조가 없었던 거지요. 선배들에게 또 찾아가 이걸 어떻게 바꿔야 하느냐 물으니 노조 선거에 나가면 된다더라고요. 다들 노조 활동을 하면 회사에 찍히니 나설 용기는 없었고 설마 쟤가 뭐 되겠나 했겠지요. (웃음) 저는 당연한 일을 한다는 생각이라 찍히는 건 두렵지가 않았어요.”
이후 1988년 노조민주화투쟁위원장에 선출되면서 양한웅 위원장은 본격적으로 노동 운동을 시작했다. 초반에는 노동자를 위하는 노조를 만들기 위한 노조 민주화에 힘을 쏟았다. 그러다 한국통신 민영화가 추진되자 민영화 반대운동에 나서던 중 한국통신으로부터 1991년 해고 통보를 받았다.
“다른 동지들은 다 현장으로 돌아가고 위원장이었던 저 혼자 해고자 신분으로 노조 옥탑방 사무실에 남았지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추운 곳에서 혼자 투쟁하려니 다 포기하고 싶었어요. 노조도 바뀔 것 같지가 않고, 가족들도 있는데 생계가 되지 않으니 그게 가장 힘들었죠. 근데 회사로 돌아간 친구들, 동료들이 1000원, 2000원씩 모아주기 시작했어요. 복직하기 전까지 3년을 그걸로 생활했습니다. 포기하고 싶어도 친구들 전화 한 통화에 또 마음 추스르고, 유인물 뿌리러 다니고, 전국적으로 쫓아 다니다 보니 어느새 노조도 바뀌었어요.”
부끄러움에서 출발한 비정규직 운동
3년 만인 1994년 복직한 양한웅 위원장은 한국통신 민영화 반대 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다 구속돼 1994년, 1995년에는 거듭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옥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금강경을 필사하며 불안감을 추슬렀다. 풀려난 뒤로도 해고자 신분으로 노조 활동을 지속했고, 2001년부터 2년간은 공공연맹(현 공공운수노조) 수석부위원장으로도 지냈다.
IMF 이후 정부가 ‘노동의 유연화’를 앞세우며 언제든 해고해도 좋은 비정규직 양산을 장려하던 때였다. 2000년 한국통신 역시 계약직 노동자를 대상으로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한국통신 내에도 해고 철회 및 정규직 전환을 촉구하는 계약직 노동조합이 꾸려졌다. 약 1년 반에 걸친 파업 끝에 한승훈 조합원이 숨졌고, 198명이 구속됐으며, 3억 원이 넘는 벌금과 손해배상액이 남았다. 끝내 ‘도급업체 취업을 알선하겠다’는 수준의 사측 제안에 합의하면서 계약직노조의 파업은 뼈저리게 끝났다.
“그때만 해도 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들조차 비정규직 운동을 몰랐어요. 그런데 한국통신이 7000명이란 어마어마한 노동자들을 일시에 해고하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단 한 명도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않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죠. 아무것도 못 도왔다는 죄스러움을 계속 갖고 있었어요. 점점 정규직 운동은 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2007년 앞으로는 열악한 조건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평생 살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이하 불안정노동연대)에 들어갔습니다.”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출범
한편 2009년 쌍용차 사태와 용산 참사가 잇따라 벌어지면서, 조계종 내부에서는 노동 등 사회 문제에 대응할 기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이기 시작했다. “기독교나 천주교는 노동 등 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해 왔지만 불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조계종에서 노동위원회가 꾸려질 거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너무 반가웠지요. 그래서 스님들을 뵐 때마다 꼭 만드셔라, 그러면 저도 힘껏 돕겠다고 그랬죠.”
그러다 노동위원회 구성을 도와달란 부탁을 받았다. “노동 문제를 잘 모르는 채로 종교에서 위원회를 만들면 형식적인 단체가 될 테니 잘 아는 사람이 맡아주길 원했던 거지요. 불안정노동연대 성원들에게 얘기하니 ‘그 일도 꼭 필요한 일 같으니 가서 하셔라, 그렇지만 불안정노동연대 대표직도 버리지 않고 계속 하신다고 약속해야 한다’ 그렇게 허락해줘서 맡게 됐습니다.”
그렇게 조계종 노동위원회는 2012년 8월 27일 “약자의 아픔을 보듬고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겠다”는 발원문과 함께 출범했다. 스님들이 노동 현장을 찾는 모습은 조계종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낯선 일이었지만 양한웅 위원장은 철저히 불교적인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10년간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목탁과 염불, 오체투지 등 불교적인 방식으로 현장에 자리했던 것이 종교 내에서 설득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사용자들에게도 더 압박이 됐을 거란 평가다.
그러다 2015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다. 양한웅 위원장과 노동위원회 스님들은 곧장 팽목항을 찾았고 2017년 세월호가 인양되기까지 3년간 미수습 희생자 유가족들 곁을 지켰다. 세월호 참사를 지나면서 노동위원회란 명칭의 한계가 두드러졌다. “왜 노동위원회가 세월호 현장에 있느냐는 질문도 있었고요. 비단 노동 문제 뿐만 아니라 세월호와 같은 현장에도 저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름을 바꾸자고 했지요. 사회노동위원회(이하 사노위)로 개편하면서 스님들도 20명가량 늘었고, 사무실도 생기고, 예산 규모도 커졌습니다.”
성소수자 차별 반대 스님
성소수자 문제를 처음 접한 것은 2014년이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을 담은 서울시민인권헌장을 폐기하면서 성소수자 단체들이 서울시청에서 농성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사노위가 농성장을 찾았다가 저도 성소수자 차별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됐어요. 그 뒤로 무작정 성소수자 활동가들을 찾아가서 ‘나 성소수자 운동을 하고 싶은데 잘 모른다, 좀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웬 나이 든 아저씨가 와서 그러니 못 믿는 눈치였지요. (웃음) 그래도 성소수자 활동가 친구들을 만나면서 제가 많이 배웠어요.”
이후 사노위는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에 연대체로 소속돼 활동을 이어왔다. 사노위는 매년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집회 등 성소수자 인권 관련 현장은 물론 각지에서 열리는 퀴어 퍼레이드에도 빠지지 않고 자리하고 있다. 2020년 8월 양한웅 위원장은 전국을 13일간 버스로 일주하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평등버스’에 고정 멤버로 탑승하기도 했다.
노동 운동에 잔뼈가 굵은 선배로서 후배 성소수자 활동가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날도 있었다. “너희들 이렇게 해서 언제 성소수자 해방되겠냐고 그랬지요. (웃음) 고공 농성도 하고 단식도 하고 서울 시장 출마도 하고 그래야지, 소극적으로 운동하면 안 된다고요. 비정규직 운동도 전태일 열사부터 죽음까지 불사르는 투쟁 속에서 성장해오지 않았나요. 저돌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했었어요.”
“그러나 성소수자 운동은 지난 7~8년 동안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과 함께 비약적으로 성장했어요. 평등버스를 돌면서 성소수자의 차별 현실을 목도하기도 했지만, 차별금지법 운동이 전국적으로 조직되는 과정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기획력이나 집행력이 늘었을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활동가들도 정말 많이 늘었지요. 자신을 드러내는 성소수자들이 늘어나는 만큼 성소수자 운동도 더 발전해나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나이 든 아저씨’가 성소수자 인권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쉬이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양한웅 위원장은 불자로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답했다. 평생 바쳐 온 비정규직 운동 역시 차별 반대 운동이기도 했다. “불교는 전생에 쌓은 업보에 따라서 이번 생에 이러한 모습으로 태어났다고 봅니다. 그렇게 태어난 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탐욕, 어리석음, 노여움을 떨치는 것이지, 생의 형태가 어떠한가가 아니에요. 성별, 피부색, 직업, 성적 지향성, 장애 여부, 그 형태가 무엇이든 마찬가지예요.”
“부처님도 눈에 보이는 생명의 형태를 두고 차별하면 안 된다는 말씀을 거듭 합니다. 차별하는 마음 자체가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니 교만함이기도 하고요. 제가 차별금지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차별금지법의 존재 자체가 그런 교만한 마음에 경각심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인지, 차별적인 언행은 아닌지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큰 변화를 일으킬 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