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어 수업‘... 그리고 2,840명의 이름이 남았다
'페르시아어 수업‘... 그리고 2,840명의 이름이 남았다
  • 곽은주 기자
  • 승인 2022.12.18 16: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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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버린 이름들

인간은 언어의 동물이다. 시대에 따라서 사라지는 말이 있고, 또 새로 만들어 쓰는 말이 있다. 인간은 언어로 예술 작품을 만든다. 문학 작품이 대표적이지만,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페르시아어 수업>은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말하는남자와 거짓말을 듣는두 남자 사이의 이야기다. 영화는 언어를 매개체로 두 남자가 서서히 마음의 빗장을 열어가는 과정을 긴장감 있게 보여 준다. 볼프강 콜하세의 단편 소설 '언어의 발명(Erfindung Einer Sprache)’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언어란 무엇일까. 우리가 주고받는 언어의 기호는 진짜일까.

'페르시아어 수업'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페르시아어 수업'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페르시아어 수업: Persian Lessons >언어의 발명이라는 소설 텍스트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영화를 연출한 우크라이나 출신의 바딤 피얼먼(1963년생) 감독은 전쟁 중에 위트와 재치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가 많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엮어서 만든 일종의 모음집이 <페르시아어 수업>이다라고 영화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소설 언어의 발명에서 관리자 신분의 유대인(카포)에게 가짜 페르시아어 수업을 하게 된 학생의 이야기는, 영화에서 독일군 장교와 수용소에 붙잡혀 온 유대인 포로 간의 이야기로 각색됐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전쟁 이야기는 흔하게 접하는 영화 소재일 터, 그러나 <페르시아어 수업>이 특별한 영화적 긴장감과 재미를 주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인 언어를 매개로 한 주인공의 연기가 그만큼 뛰어나서다.

절대로 들키면 안 되는 거짓말을 지키기 위하여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며 하루하루를 살아 내야 하는 수고는 어떤 것일까? 그 심정은 가늠조차 어렵다. 피 말리는 긴장일 것이다.

'페르시아어 수업' 스틸컷, '코흐'대위 역의 라르스 아이딩어, ㈜영화사 진진 제공
'페르시아어 수업' 스틸컷, '코흐'대위 역의 라르스 아이딩어, ㈜영화사 진진 제공

어느 날 주인공 ’(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은 수용소에 새로 입소하는 포로의 명부를 작성하다가 번득이는 언어의 조직을 발견한다. 보잘것없는 종이 노트에 검은 잉크로 또박또박 가지런히 기록된 이름들. 그 이름들을 보는 순간, 번득이는 섬광이 스쳐간다. 이름 어간의 한 부분을 따서 새 언어로 만든다. 기발한 창작이다. 이를테면, ‘는 자신의 이름 (Gilles)’에서 따서 (il)’이라고 짓고, ‘고흐’(라르스 아이딩어) 대위의 성인 클라우스(Klaus)’에서 따서 아우(au)라고 짓는다. ’이 절대로 페르시아인이 아니라고 확신하며 '질'을 감시하는 장병의 이름인 막스(Max)’에서 죽음이라는 단어 악스(ax)를 만든다.

물론 페르시아어를 독일어 발음으로 기록한다. 페르시아어로 쓰기와 읽기는 불가능하므로 페르시아어의 발음을 독일어로 기록한다. 대화만 할 수 있으면 된다는 설정이 참 영화적이다.  사람의 이름과 그 사람이 풍기는 이미지와 성격, 분위기를 연관시켜서 가짜 페르시아어 단어를 만든다. 정말 기막힌 언어의 발명이다.

'페르시아어 수업' 스틸컷, '질'역의 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영화사 진진 제공
'페르시아어 수업' 스틸컷, '질'역의 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영화사 진진 제공

1942년 겨울부터 1945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군이 프랑스 강제 수용소를 떠날 때까지 건 3년 동안 가짜 페르시아어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단어들의 배후에는 강제 수용소에서 무참히 죽은 2,840명의 유대인이 있었다.

이미 불타버려 소멸한 죽은 자의 기록은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지만, ’의 기억에는 또렷이 저장되어 있었다. 2,840명의 이름이 하나하나 호명되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뜨거움이 북받친다. 참혹한 전쟁의 상흔이다. 실제로 영화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프랑스인 희생자들의 이름을 기반으로 극 중 가짜 페르시아어를 제작했다고 한다.

유대인 과 페르시아인 '레자 역을 한 배우 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1986년생)는 제70회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120BPM>에서 주인공 ''역을 맡으며 이름을 알렸다. 그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으로 스페인어가 모국어임에도 불구하고 극 중에서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한다. 이에 대해 그는 다른 언어로 연기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때로는 모국어가 아닌 언어들이 감정을 해소하는 데 더 편한 것 같다라며 나름의 연기 한 수를 전했다.

에게 가짜 페르시아어를 배우는 독일군 장교 '코흐' 역은 독일의 국민배우 라르스 아이딩어(1976년생)가 맡았다. 누구에게도 틈을 보이지 않는 냉혈한 독일군 장교로 ''을 향한 의심을 끈을 거두지 않고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서늘한 악인의 모습부터, 점차 ''에게 마음의 빗장을 여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페르시아어 수업'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페르시아어 수업'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코흐와 질을 연기하는 다른 배우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라고 말한 바딤 피얼먼 감독의 말처럼, 두 배우의 연기는 극의 완성도를 높인다. 두 배우의 연기에 더하여 극도로 제한된 수용소의 어둡고 내밀한 공간의 폐쇄함과 누추하기 짝이 없는 수용소 내부와는 별개로 수용소 밖의 넓은 자연의 자유로운 풍경의 화면 대비는 영화만이 줄 수 있는 미장센을 선물한다. 이는 순전히 감독의 미적 감각일 터.

페르시아인인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고흐대위 앞에서 암송한 가짜 페르시아어 시(히브리어 시가 아닐까 추측)는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로 큰 여운을 준다. “당신은 태양이 천천히 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하지만 갑자기 어둠이 내리자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그렇다. 영화는 시종일관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정책에 근거한 강제 수용소를 밀도 있게 보여 준다. 세월은 흘렀어도, 기억은 강제 수용소 시절의 고통을 간직하고 있었다. 관객은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곽은주 기자 cineeun6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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