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 별의 시간은 사라졌네
‘바빌론’... 별의 시간은 사라졌네
  • 곽은주 기자
  • 승인 2023.02.10 2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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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패러독스

15년을 기다렸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초창기 할리우드의 흑역사를 영화로 만들기 위하여 힘을 키워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메이저 영화사인 파라마운트가 그에 손을 들어 줬다. 신데렐라에 유리구두 같은 매직의 꿈의 공장 할리우드. 그러나 마법이 풀린 할리우드는 영화롭지 않았다.

'바빌론' 스틸컷, (왼쪽)매니 토레스 역의 '디에고 칼바', 잭 콘래드 역의 '브래드 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바빌론' 스틸컷, (왼쪽)매니 토레스 역의 '디에고 칼바', 잭 콘래드 역의 '브래드 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바빌론:Babylon>1926년부터 1932년의 할리우드가 배경이다. 1920년대 영화 산업은 위기에 몰려 있었다. 변사의 해설이나 생음악 연주 등으로 무성영화의 한계를 보완하던 영화는 라디오의 등장으로 대중에게 조금씩 외면당하고 있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영화사들은 화면에 소리를 넣는 기술 개발에 전력을 기울였고, 영사기에 축음기를 연결한 바이타폰(vitaphone)이 등장하면서 유성영화의 기술적 토대가 마련됐다.

무성영화가 영화 예술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여긴 분위기가 있었지만, 현실적으론 라디오에 관객을 빼앗길 수밖에 없던 위기 상황에 봉착했다. 파산 직전에 몰린 워너 브러더스가 실험적으로 부분만 소리를 입힌 작품을 만들어 성공한 뒤 1927년 유성영화인 앨런 크로슬랜드 감독(1894~1936)재즈 싱어가 대성공을 거둔다. ‘무성에서 유성으로 넘어가던 시절의 할리우드 분위기는 1952년에 개봉된 스탠리 도넌 감독과 진 켈리가 연출과 주연을 맡은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잘 보여 준다.

<바빌론> 역시 동시대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한다. 사랑은 비를 타고의 그 유명한 “Singin' In The Rain” 장면을 <바빌론> 엔딩에서 오마주로 보여 준다.

이제 189분간의 판타지는 끝났지만, 관객은 스크린 뒤의 복잡한 속사정은 알 필요가 없다는 듯이, 빗속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것처럼, 비록 세찬 비가 내려도 영화란 마음엔 뜨거운 태양을 품는 행복이니, 당신은 영화의 별의 순간만 기억하면 된다고 속삭이는 것 같다.

'바빌론' 스틸컷, 넬리 라로이 역의 '마고 로비',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바빌론' 스틸컷, 넬리 라로이 역의 '마고 로비',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우선 놀랍다. 할리우드의 치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영화의 제작사가 메이저 영화사인 파라마운트다. 그것도 각본 수정 없이 데이미언 셔젤(1985년생) 감독 의도대로 촬영됐다. 감독은 <바빌론> 각본의 틀은 이미 15년부터 구상했다. 호시탐탐 때를 기다렸다. 만약 데뷔작 <위플래쉬><라라랜드>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더 기다려야 했을지 모른다.화는 정제되지 않은 할리우드에 민낯을 보여 준다. 극명하게 구별되는 빛과 어둠의 세계처럼, 할리우드의 밤과 낮의 이면에 감춰진 욕망과 타락의 문화가 일상처럼 소비되던 그 시절이 적나라하게 묘사됐다.

당시 황무지였던 로스앤젤레스 구석에 자리 잡은 제작사들은 영화의 제작공정을 분업화, 표준화하여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한다. 창작물인 영화를 표준화, 계량화하는 건 예술의 본질을 거스르는 것처럼 받아들여졌지만 할리우드는 탁월한 시스템을 고안하여 불가능을 이뤄냈다. 바로 장르와 스타를 중심으로 한 스튜디오 시스템이다.

20세기 초 로스앤젤레스, 그중에서도 외곽에 있는 작은 동네 할리우드는 황무지에 가까웠다. 이곳에 영화인들이 모인 이유는 영화 촬영에 최적의 입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LA는 풍부한 일조량에 비가 적게 내려 촬영을 할 수 있는 날이 그만큼 보장되었기에. <바빌론>에서는 당시의 촬영 현장을 유려한 영상으로 보여 준다. 흙먼지 나풀대는 넓은 촬영장 끝으로 지는 석양의 처연하고 안온한 평화의 순간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어떤 예술의 한 형태와 그 산업이 처음 형성되던 초창기의 일들, 이들이 막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을 세밀히 들여다보고 싶었다.”며 제작 의도를 밝혔다. 감독은 당대의 사진, 영상, 문헌 등 폭넓은 자료 조사를 통하여 <바빌론>의 전반적인 캐릭터와 이야기를 구성했다.

'바빌론' 스틸컷, 시드니 팔머 역의 '조반 아데포',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바빌론' 스틸컷, 시드니 팔머 역의 '조반 아데포',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상만큼이나 음악이 매혹적이다.

<위플래쉬>(2015), <라라랜드>(2016), <퍼스트맨>(2018)에서 함께 작업한 저스틴 허위츠 음악감독이 <바빌론>의 음악을 맡았다. 저스틴 허위츠는 데미언 샤젤 감독과 하버드 대학교 동문이자 친구 사이. 저스틴 허위츠 감독 3년간 <바빌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완성한 각본을 두고 음악 작업을 할 때도 있었고, 반대로 음악을 토대로 감독이 콘티를 만들기도 했다. 처음부터 음악과 영화 연출은 공생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고 전한다. 저스틴 허위츠 음악감독의 황홀한 사운드트랙은 스크린을 웅장하고 풍성하게 채운다.

찬란한 전성기를 누리는 당대 최고의 스타 잭 콘래드역은 브래드 피트가, 혜성같이 떠오른 스타 넬리 라로이역은 마고 로비가, 그리고 두 스타 사이를 오고 가는 할리우드 입성을 꿈꾸는 청년 매니 토레스역에 디에고 칼바가 열연한다.

바빌론은 '신의 문'이란 뜻의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수도. 막강하고 아름답기로 소문난 바빌론은 멸망했고 현재는 유적만 남아 있다. 감독은 할리우드의 영화(英華)를 고대 도시 바빌론에 빗대어 표현했다. 한때 찬란한 빛이었건만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영화(英華)로운 시절로.

곽은주 기자 cineeun6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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