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번 칸'... 겨울 햇빛이 앉아 있다
'6번 칸'... 겨울 햇빛이 앉아 있다
  • 곽은주 기자
  • 승인 2023.03.11 16: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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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카와 흰 눈 그리고 암각화

우여곡절 끝에 고대 암각화 유적지에 도착하니, 그곳엔 겨울 햇빛만 살포시 앉아 있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얌전히 누워있는 암각화. 그게 다였다. 며칠 낮과 밤을 달려온 고단한 수고에 비하면 참 소박한 풍경이다. 그런데 그 밍밍한 장면이 오고 가는 일상의 풍경 속에 문득문득 오버랩됐다.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봄기운 속에서도 쨍한 추운 겨울의 햇빛이 놀고 있던 눈 덮인 무르만스크의 항구가 자꾸 아롱거렸다. 아 젠장. 그곳에 갈 수 없는데 말이다. 이게 이 영화의 치명적인 매력이다.

'6번 칸' 스틸컷, (왼쪽)라우라 역의 핀란드 배우 세이디 하를라, 료하 역의 러시아 배우 유리 보리소프, 싸이더스 제공
'6번 칸' 스틸컷, (왼쪽)라우라 역의 핀란드 배우 세이디 하를라, 료하 역의 러시아 배우 유리 보리소프, 싸이더스 제공

핀란드 출신의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의 영화 <6번 칸:COMPARTMENT NO. 6>(2021)은 핀란드의 로사 릭솜(Rosa Liksom)의 소설 [6번 칸]이 원작이다. 감독은 <6번 칸>의 출발점을 풍경, 기차, 모스크바 그리고 매우 다른 캐릭터 사이의 인간관계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구상했다고 한다. 소설 [6번 칸]은 다양한 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영화 <6번 칸>은 서로 다른 시간 배경을 생략하고 모스크바에서 무르만스크 기차 여행으로 변경했다. 시대도 80년대 소련의 모습 대신 90년대 후반의 모습을 그렸으며 캐릭터의 나이 또한 변경하여 영화 속 라우라(세이디 하를라)와 료하(유리 보리소프)의 캐릭터가 탄생했다.

영화의 배경을 1990년대 후반으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감독은 “90년대 후반에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답을 얻을 수 있는 스마트폰이 없었기 때문에 낯선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야 했다. 이처럼 우리가 서로에게 의존적이었다는 생각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또한, <6번 칸>이 추억처럼 느껴지기를 원했다고 했다. 90년대 감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영화는 필름으로 촬영됐다.

'6번 칸' 스틸컷, (왼쪽)라우라 역의 핀란드 배우 세이디 하를라, 료하 역의 러시아 배우 유리 보리소프, 싸이더스 제공
'6번 칸' 스틸컷, (왼쪽)라우라 역의 핀란드 배우 세이디 하를라, 료하 역의 러시아 배우 유리 보리소프, 싸이더스 제공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산과 들은 흰 눈으로 덮여있다. 세상 더럽고 초라한 모습을 순백의 흰색으로 아름답게 덮어 버린 것처럼 반짝거렸다. 라우라는 사랑하는 연인이 원하는 여행이라서 마지못해 등 떠밀려 기차에 올랐다. 설상가상 동승한 남자는 거칠고 무례했다. 라우라는 핑계 삼아 여행을 접고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갈 생각을 한다. 아뿔싸. 그런데 연인에게 그 마음을 들키고 만다. 싫어도 무르만스크까지 가야 하는 상황.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라우라의 여행은 시작됐다. 달리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마치 흰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처럼 광활하고 장대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눈의 신비로운 흰빛은 무한한 자연의 외경심을 자아낸다.

'6번 칸' 스틸컷, 싸이더스 제공
'6번 칸' 스틸컷, 싸이더스 제공

보드카와 흰 눈 그리고 고대 암각화의 조합은 이 영화의 주요 키워드다. 암각화로 은유되는 과거는 이미 흘러갔고, 불확실한 미래는 아직 안 왔다. 그리고 운명이 어떻게 될진 아무도 모른다. 주인공 라우라와 료하는 현재를 산다. 남녀가 마음을 열어가는데 기차 여행과 보드카와 흰 눈은 더 없이 낭만적이다.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의 죽음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료하가 인편으로 라우라에게 전해 준 틀린 핀란드 말로 고백한 사랑해라는 서툰 메모는 관객의 마음마저 뒤척이며 설레게 한다.

곽은주 기자 cineeun6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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