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가 판치는 이 세계
판타지가 판치는 이 세계
  • 정은경 방송작가
  • 승인 2023.03.17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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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기를 끌었던 <재벌집 막내아들>이란 드라마는 웹소설이 원작이다. 
재벌일가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하던 비서가 그 재벌가의 막내아들로 환생해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일종의 판타지 소설로 그 당시 인기를 반영하듯 드라마 종영 후에도 다시 웹소설을 읽거나 원작과 드라마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하는 재미도 한동안 이어졌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친구들이나 사람들을 만나면 먼저 꺼내는 이야기가 <재벌집 막내아들>이었다. 

그때 누군가 나에게 웹소설을 써보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를 했다. 그 얘기를 듣고 처음엔 요즘 젊은 감각을 어떻게 따라 가냐? 그리고 ‘작가’라고 다 같은 작가인줄 아냐며 어림없다는 반응으로 웃어넘겼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껏 시도를 해보지 않아서 그렇지 웹소설이라면 등단도 할 필요 없고, 진입장벽도 그리 높지 않으니 소재만 잘 고른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소설가 타이틀을 갖고 나오나? 더구나 나는 플롯에 강한 방송‘작가’가 아니던가... 

마음을 고쳐먹고, 최근 유행하는 웹소설 몇 편을 읽기 시작했다. 웹소설을 쓰려면 어떤 내용이 트렌드인지 알아야 하니. 그런데, 몇 편 읽지 않고도 눈에 띄는 특징을 하나 발견했다.  

판.타.지.

요즘 웹소설은 죄다 ‘판타지’ 장르다. 그 이름도 낯선 ‘로판’, ‘현판’, ‘판드’...  
로맨스도 판타지고, 성공하는 이야기도 판타지다.  
얼마 전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이(異)세계를 다룬’ 작품이라는 낯선 말을 나중에 이해하곤 혼자 어이없어 했던 적이 있었는데,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 지금은 한국이든, 일본이든 이 세상 이야기 보다는 다른 세계, 판타지 세계가 대세가 된 것 같다.    

왜 그럴까? 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李) 세계, 판타지가 유행을 하고 있을까? 
내용을 보면, 거의 대동소이하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지금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이나 성공을 이(李) 세계나 판타지 속으로 들어가 이룬다는 내용. 그리고 반드시 그곳에서 주인공은 전지전능한 신처럼 모든 것을 다 아는 이가 되거나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판타지에선 주인공의 고난은 그리 크지 않다. 누군가 배신을 해도 잠깐 당황할 뿐 금방 지혜롭게 묘안을 짜내고, 승승장구한다. 판타지 캐릭터의 능력이 월등하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돌이켜보니 <재벌집 막내아들>도 그랬다. 주인공이 어떻게 복수하고 승리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고난을 겪거나 주변 이들과 심한 갈등으로 어려움에 처하는 내용은 거의 없다. 그것들은 단지 캐릭터의 매력발산을 위한 양념 정도라고나 할까? 때문에 보는 사람에 따라 심심할 수도 있지만, 웹소설을 즐겨 찾는 대부분의 젊은층(반드시 젊은 세대만 보는 건 아니지만)에겐 단순한 플롯과 능력자의 등장이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이 아닌 판타지, 어려움도 한 번에 해결하는 완벽한 캐릭터... 요즘 젊은이들이 웹소설에서 읽고 싶어 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웹소설을 쓰고자하는 의욕보다 먼저 짠한 마음이 들었다.  
이 세상에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원하고 바라는 꿈을 이루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웹소설이라는 도피(?)처를 찾은 것일까? 

이 세상에선 사랑도 힘들고, 성공도 힘들다는 걸 안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고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고, 성실과 노력만 가지고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외모와 학벌, 능력과 같은 외적인 조건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고, ‘개천에서 용 난다’가 옛말이 된 것처럼 평범한 이가 배경 좋은 상대를 이길 수 없는 구조가 된지도 오래다. 그러니 내가 어쩌지 못하는 이 ‘태생-타고남’의 좌절 짙은 마음을 달래줄 곳이 판타지 말고 어디 있으랴.

지친 이들을 위해 나는 한 편의 웹소설을 써야할까? 그렇다고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판타지를 너무 많이 보면 현타가 올 수 있으니 웹소설은 그만 보고 현실에 충실하세요’라든가 ‘노력하면 언젠가는 꿈이 이뤄져요’, ‘행복을 위해선 마음을 긍정적으로 가져야 해요’ 라는 말들을 쓰기는 더욱 미안하다. 그들의 삶의 무게는 정말로, 정말로 너무 무거운 것 같으니... 

정은경 방송작가 pdirow@naver.com

정은경 방송작가

20여 년 동안 시사, 교양 분야의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다.
주요 프로그램으로 CBS <변상욱의 시사터치>, EBS <김민웅의 월드센터>, <생방송EBS FM스페셜> KBS <보고싶은얼굴, 그리운 목소리>, <월드투데이>, <라디오주치의> tbs <서울 속으로> 등 다수가 있고, 현재는 TBS <우리동네라디오>를 시민제작자와 함께 만들고 있다.
치열한 방송현장에서 일하면서 나만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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