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스토리텔링
삶의 스토리텔링
  • 정은경 방송작가
  • 승인 2023.04.20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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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가 방과 후 수업을 시작했다. 
초등학생 5~6학년을 대상으로 영어수업을 했다는데 그 반응이 궁금했다. 10명 남짓한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그리 만만치 않아보였기에...

그런데, 그 친구의 반응이 의외로 행복해보였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보니 자신도 정화되는 느낌이었단다. 그 느낌이 거짓이 아닌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소감을 얘기하는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정말 거짓말은 아닌가 보다. 

분명 현실은 그렇지 않을텐데.

정식 학교 교사와는 달리 외부에서 온 사람이니 아이들이 조금은 편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집중도 안하고, 자기들끼리 떠들고, 장난치려고 하고, 말도 잘 안 듣고, 정신없이 혼을 빼놓았을 법도 한데 정화되는 느낌까지 받았다니 이외였다. 
나라면 아무리 귀여워 보이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라고 해도 ‘정신없어 혼났어, 수업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 다 하고 나니 진이 다 빠지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을 것 같은데...

의외의 답변에 나도 좀 당황을 했는지 재차 물었다. 그래도 아이들을 상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피곤하지 않냐고.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웃으며 아이들의 관심과 열의에 감동했다고 한다. 

난 그 친구에게 무슨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긍정적으로 보는 그 친구가 부정적인 얘기를 하는 것을 원했을까? 나의 부정적인 생각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라며 정당화 하고 싶었던 걸까?

김주환이 쓴 『회복탄력성』이란 책에선 이런 얘기가 나온다. 
점심시간 후에 “나는 오늘 점심때 친구들과 만나서 냉면을 먹고 헤어졌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자. 하지만 실제의 경험에선 그 어디에도 ‘친구와 냉면을 먹었다’라고 부를만한 특정한 행동은 없다는 것이다. 대신, 자잘한 행동들이 끊임없이 이어질 뿐. 

그 자잘한 행동이라고 하면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가 점심시간이 되자, 전화기를 꺼내 친구들과 냉면 집 앞에서 만나기로 한다. 그리고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서, 옷을 입고, 회사 문을 나서고, 승강기 앞에 서고 승강기 문이 열려서 타고.... 냉면집 앞에서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냉면을 주문하고, 24번 씹고, 삼키고, 물을 마시고 등등이다. 

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자잘한 행동들의 어느 부분을 자의적으로 끊어내고 편집해서 우리는 ‘친구와 냉면을 먹었다’라고 의미부여를 하며 스토리텔링을 한다고 한다.   
그 스토리텔링된 기억, ‘친구와 냉면을 먹었다’는 것은 꽤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지만 자잘한 행동은 며칠만 지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경험과 기억은 내가 하는 스토리텔링의 형태로 기억할 뿐이다.   

그러면서 저자 김주환은 <내가 세상을 경험하는 것은 경험하는 대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그 경험에 대해 부가적으로 이야기한다기보다, 내가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해서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방과 후 수업을 한 친구를 떠올려본다. 
그녀는 수업 시작음이 들리자, 교실 문을 열었고, 떠들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얘기를 서너 번 했고, 집중 못하는 아이들에게 반복해서 여러 번 얘기하고, 엉뚱한 질문을 하는 아이 때문에 다시 교실이 어수선해지고, 어이없어 같이 웃고, 떠들었다.

방과 후 수업을 했었던 이 자잘한 행동과 시간들 중에서 그녀는 아이들의 웃는 모습과 천진난만한 행동들을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했다. 때문에 그녀의 방과 후 수업의 경험은 ‘행복’이라는 말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나의 스토리텔링은 어떤가? 상황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나의 이 부정적인 생각은 다 불행한 사건 때문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할 것인가? 내 삶의 주인이 나라면 나는 비극을 원하는 가? 해피엔딩을 원하는 가? 내가 만들어가는 이야기에 달렸다.  


정은경 방송작가 pdirow@naver.com

정은경 방송작가

20여 년 동안 시사, 교양 분야의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다.
주요 프로그램으로 CBS <변상욱의 시사터치>, EBS <김민웅의 월드센터>, <생방송EBS FM스페셜> KBS <보고싶은얼굴, 그리운 목소리>, <월드투데이>, <라디오주치의> tbs <서울 속으로> 등 다수가 있고, 현재는 TBS <우리동네라디오>를 시민제작자와 함께 만들고 있다.
치열한 방송현장에서 일하면서 나만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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