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과 리액션

2021-12-03     정은경 방송작가

나에게 영어는 적이 아니라 짝사랑의 대상이다. 
적이라면 간단히 무시하고 살면 되지만, 영어는 그게 잘 안 된다.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을 보면 늘 부럽고, 멋있어 보인다.

한때는 잘 해보려고 학원도 다니고, 공부도 해봤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늘 start and quit, start and quit, start and quit… 
영어 실력이 늘기는커녕 늘 제자리다.

그러다, 작년에 우연히 재미교포를 만나 다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특별한 교재가 있는 건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 저녁 식사를 하면서 영어로만 말하기로 했다. 

올해 마흔이 된 재미교포는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후 이민을 갔는데, 
몸에 배인 습관은 완전 미국인이다. 만날 때마다 포옹한다. 
그 어색함이란… 
평소 이성이나 동성끼리 터치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그녀를 거부할 수는 없다. 나의 소중한 영어 선생님이니.

그 친구가 반갑다며 포옹을 하면 
나는 한 손으로 등을 살짝 감싸면서 치는 둥 마는 둥…
‘꼭 포옹을 해야 영어를 잘 할 수 있나?’

삽화/

음식을 가운데 두고, 얘기할 때도 그렇다. 
내가 더듬거리며 뭔가를 얘길 하기만 하면 
'oh, my', 'oh, yeah', ‘oh, no!' 'really?' 'wow'…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고, 별로 재밌는 일도 아니고, 
그저 듣고 흘릴 만한 일상인데도 늘 크게 호응을 해준다.
리액션이 너무 크다 보니 때로는 놀리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참 적응이 안 된다. 
영어는 좀 오버도 하고, 목소리 톤도 평소보다 높여야 잘 할 수 있다는데.. 
그 친구처럼 행동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내성적인 나로서는 아직 갈 길이 참 멀다. 

그런데 한 주, 두 주, 시간이 가면서 나의 생각은 조금씩 달라졌다. 
그렇게 어색하게만 느껴졌던 포옹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스트레스를 받아 지쳐있던 어느 날, 
약속을 미루고 싶을 만큼 힘든 날이었는데 
그날의 포옹은 여느 때와 달리 편안했다. 
아!! 포옹이 이렇게 따뜻할 수가 있구나. 

평소 프리허그 하는 걸 보고 왜 쓸데없는 짓을 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따뜻함이 가슴에 닿는 순간 그 어떤 말보다 위로가 되었다.  
이미 그때는 상대가 누구여도 상관이 없다. 사람의 온기만으로도 충분하다.
이후, 난 그 친구를 만날 때마다 아주 진하게 포옹을 하게 됐다.  

리액션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원래 오버를 좀 하는구나 싶어서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시간이 가면서 그 변함없는 오버 때문에 말하는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말에 집중하고, 크게 반응해 주는 것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내 스스로가 유쾌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기분 좋은 착각을 들게도 했다. 

포옹의 따뜻함과 리액션의 새로움을 발견한 후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포옹하고, 리액션을 크게 하려고 한다. 
좋은 감정을 드러내면 상대방이 기분이 좋아지고,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질 테니…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상대방에게
말까지 더해서 더 표현하고, 감정을 드러낸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표현이 서툴고, 칭찬이 박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꼭 필요한 ‘오버’일 수도…

결국, 나는 이번에도 영어회화를 배우는 대신 
영어보다는 더 소중한 관계 맺기 방법을 배우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