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방송작가라 부르며

2021-12-10     정은경 방송작가

얼마 전 아는 언니가 나에게 그냥 방송작가가 아닌.
‘원로’방송작가라는 말을 썼다. 
예전에 막내 작가로 일할 때 제일 고참이 내 나이였다며 
나는 ‘원로’가 맞다고 했다. 

원로라니? 
나이가 7, 80 정도 돼야 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50갓 넘은 나에게 ‘원로’라니

사실, 따지고 보면 방송가에선 원로가 맞을지도 모른다. 
내년이면 방송작가 생활 25년 차.
라디오에선 내 나이에, 내 경력에 아직 현업에 있는 이들이 거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일하는 방송사엔 딱 한 명, 
나보다 나이 많은 선배가 있었는데 이제 그녀도 떠났다. 

대체적으로 방송국엔 드라마나 예외적인 몇몇 분야를 제외하곤
방송작가의 평균 나이가 그리 높지 않다.
메인 작가를 뽑는다고 해도 거의 10년 차 내외 정도? 
20년 차 이상을 뽑는다는 공고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같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금도 일을 하고 있는 한 후배는.
이력서를 내야 할 경우엔 경력을 축소해서 보낸단다.
경력이 너무 많다 싶으면 같이 일하는 쪽에선 부담이라나?

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력이 그리 많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서든 경력을 많게 보이려고 이것저것 다 갖다 붙였는데
이제는 이것저것 다 떼 내야 한다니… 참 아이러니다.

경력을 경력으로 내세우지 못하고 감춰야 하는 방송가.
시대가 많이 흘렀어도,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그 기막힌 현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故 박완서 선생은 요즘 사람들의 나이는 
살아온 햇수에 0.7을 곱해야 제 나이라고 했는데, 
이런 계산법으로 하면 나는 50도 아니고 이제 고작 35세다. 
마흔도 되지 않아 원로라니. 참, 방송작가도 못 해 먹을 짓이다.
다른 곳에선 내 나이가 많거나 늙었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방송국에만 오면 급슬퍼지는 이유다.

하지만, 영어권 외국 방송사는 사정이 좀 다르다.
한국에서 점점 더 방송작가로 일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다 보니 
작년부터 외국 방송사에 눈을 돌리고 있는데.
그곳에선 경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인정하고 대우를 해준단다.
처음엔 한국의 분위기만 생각하곤 앞서 얘기했던 그 후배마냥 
경력을 축소해서 보냈더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수상경력도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다고 해서 이것저것 자잘한 것까지 막 갖다 붙였다.
 
영어로는 요즘 방송작가를 
broadcasting writer라고 하지 않고 creator라고 하는데.
창작자라고 하면 경력과 연륜이 곧 실력이고, 
좋은 아이디어와 기획이 나올 수 있는 발판이 된다고 여긴단다.

한국에선 방송작가는 ‘창작자’가 될 수 없는 걸까? 
사회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한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감각이 급격히 떨어지는 건 아닐 테고, 
더구나 이 나이에 체력이 부족해서 일하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겠나?
신선한 아이디어나 기획 역시 나이가 젊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야 그때야 비로소 좋은 게 나오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약간 다른 얘기지만, 문득 <오징어게임> 감독이 인터뷰했던 게 생각났다.
그는 오래전에 먼저 한국의 여러 방송사에 제안했지만, 
방송사에선 하나같이 기괴하며 이상하다고 거부를 했었단다. 
그런데, 넷플릭스는 넙죽!!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암튼, 이 나이를 부담이라 여기는 곳엔 굳이 나도 연연할 건 없다. 
세상은 넓기에 할 일도 많다고 하지 않던가?
이 넓은 세상에 나 하나 인정해주는 곳이 없을까?
나는 아직 창창한 35살이니 
벌써부터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고 서글퍼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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