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번 칸'... 겨울 햇빛이 앉아 있다

보드카와 흰 눈 그리고 암각화

2023-03-11     곽은주 기자

우여곡절 끝에 고대 암각화 유적지에 도착하니, 그곳엔 겨울 햇빛만 살포시 앉아 있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얌전히 누워있는 암각화. 그게 다였다. 며칠 낮과 밤을 달려온 고단한 수고에 비하면 참 소박한 풍경이다. 그런데 그 밍밍한 장면이 오고 가는 일상의 풍경 속에 문득문득 오버랩됐다.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봄기운 속에서도 쨍한 추운 겨울의 햇빛이 놀고 있던 눈 덮인 무르만스크의 항구가 자꾸 아롱거렸다. 아 젠장. 그곳에 갈 수 없는데 말이다. 이게 이 영화의 치명적인 매력이다.

핀란드 출신의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의 영화 <6번 칸:COMPARTMENT NO. 6>(2021)은 핀란드의 로사 릭솜(Rosa Liksom)의 소설 [6번 칸]이 원작이다. 감독은 <6번 칸>의 출발점을 풍경, 기차, 모스크바 그리고 매우 다른 캐릭터 사이의 인간관계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구상했다고 한다. 소설 [6번 칸]은 다양한 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영화 <6번 칸>은 서로 다른 시간 배경을 생략하고 모스크바에서 무르만스크 기차 여행으로 변경했다. 시대도 80년대 소련의 모습 대신 90년대 후반의 모습을 그렸으며 캐릭터의 나이 또한 변경하여 영화 속 라우라(세이디 하를라)와 료하(유리 보리소프)의 캐릭터가 탄생했다.

영화의 배경을 1990년대 후반으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감독은 “90년대 후반에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답을 얻을 수 있는 스마트폰이 없었기 때문에 낯선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야 했다. 이처럼 우리가 서로에게 의존적이었다는 생각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또한, <6번 칸>이 추억처럼 느껴지기를 원했다고 했다. 90년대 감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영화는 필름으로 촬영됐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산과 들은 흰 눈으로 덮여있다. 세상 더럽고 초라한 모습을 순백의 흰색으로 아름답게 덮어 버린 것처럼 반짝거렸다. 라우라는 사랑하는 연인이 원하는 여행이라서 마지못해 등 떠밀려 기차에 올랐다. 설상가상 동승한 남자는 거칠고 무례했다. 라우라는 핑계 삼아 여행을 접고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갈 생각을 한다. 아뿔싸. 그런데 연인에게 그 마음을 들키고 만다. 싫어도 무르만스크까지 가야 하는 상황.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라우라의 여행은 시작됐다. 달리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마치 흰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처럼 광활하고 장대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눈의 신비로운 흰빛은 무한한 자연의 외경심을 자아낸다.

보드카와 흰 눈 그리고 고대 암각화의 조합은 이 영화의 주요 키워드다. 암각화로 은유되는 과거는 이미 흘러갔고, 불확실한 미래는 아직 안 왔다. 그리고 운명이 어떻게 될진 아무도 모른다. 주인공 라우라와 료하는 현재를 산다. 남녀가 마음을 열어가는데 기차 여행과 보드카와 흰 눈은 더 없이 낭만적이다.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의 죽음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료하가 인편으로 라우라에게 전해 준 틀린 핀란드 말로 고백한 사랑해라는 서툰 메모는 관객의 마음마저 뒤척이며 설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