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 잊혀지지 않는 추억의 빛과 그림자
영화 미나리.... 잊혀지지 않는 추억의 빛과 그림자
  • 곽은주 기자
  • 승인 2021.03.14 21: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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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하나가 스르르 환해지며 묻는다.

'그대들은 뭘 기다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

어둠이 없는 세상? 먼지 가라앉은 세상?

어둠 속에서 먼지 몸 얼렸다 녹이면서 빛 내뿜는

혜성의 삶도 살맛일 텐데.'

'겨울밤 05'(황동규)

사진= 판시네마 제공
사진= 판시네마 제공

영화 <미나리>를 봤다. 겨울이 서서히 지나가는 2월 중순에. 그리고 봄이 막 열리기 시작하는 3월에 다시 봤다. 그 뒷맛이 자꾸 생각나서 아마도 또 볼 것 같다. 밍밍한 맛 같은데 쌉쌀하게 여운이 깊다. 사운드트랙도 녹음해서 듣고 있다. 거의 매일 듣는다. 음악을 들으면서 영화 장면들을 머리로 떠올리며 데이빗 가족의 대화들을 차곡차곡 데 짚어 본다. 좋아하는 시를 암송하듯이.

들판 위에 하얀 꽃처럼 피어있던 뭉게구름과 조잘조잘 어린 새들의 수다(병아리)와 친구에게 화투를 가르쳐 주는 데이빗(비켜라. 이놈아!)의 의기양양한 미소와 나는 결혼해서도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 거라는 천진난만한 (거짓)말과 딸이 낸 주일 헌금을 슬쩍 도로 집어 든 할머니의 천연덕스러운 무표정과 자진해서 제이콥의 농장 일을 돕는 폴의 주술적인 기도와……. 그리고 데이빗 가족이 사는 바퀴 달린 집 위로 사정없이 쏟아지는 한낮의 뜨거운 햇살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찬송가. 사방이 깜깜한 한여름밤, 무성하게 자란 수풀에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까지 듣고 나면 영화는 끝이 나는데, 마음 한 골짜기에서는 산이슬 같은 맑은 눈물이 흐른다. 모니카가 멸치를 받아들고 눈물을 흘리듯, 그냥 눈물이 난다. 영화에 이렇게 집중해 본 적이 있었나 할 만큼 매일 <미나리>로 사는 기분인데, 그런데 그 맛이 썩 괜찮다. 황동규의 시를 슴슴히 읽을 때 슴슴하게 스며드는 시의 맛이 그저 그런 사는 맛을 한 옥타브 황홀하게 덧입혀 주어 남들이 모르는 비밀의 음표로 일상을 흥얼거리는 것처럼.

사진= 판시네마 제공
사진= 판시네마 제공

장남이라서, 가장이라서, 엄마라서,

'장남으로서 가족을 돌본 것뿐이야.' 악다구니로 싸우는 부부의 깊은 애증도, ‘아직은 죽고 싶지 않다.’는 어린 손자의 두려움도, 뱀이 있어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한 외진 숲속 물가에 외롭게 집을 짓고 사는 미나리처럼,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사랑한다는 고백도 잊고 사는 고단한 나날이지만 고단하고 간절한 노동의 나날들에 어찌 거짓이 끼어들겠나. 땀 냄새 나는 노동의 신성함이여!

가족은 아니지만, 농장 일을 제 일처럼 돕는 폴은 당시 미국 교회의 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다.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하고 다녔던 세례 요한 같기도 하고, 초대교회 사도 바울()을 오마주한 것 같기도 하다. 초대교회 때 복음을 증거 한 바울이 배고픔과 추위와 병고와 유대인의 핍박을 당하면서도 아시아와 로마, 스페인까지 전도 여행을 다니며 그리스도 예수를 증언하였던 것처럼, 폴도 어린아이들에게조차 조롱을 당하지만 한결같은 믿음으로 데이빗 가족을 돕는다. 엄마 모니카 역시 아들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 방탕한 아들 어거스틴을 위하여 기도한 모니카처럼.

영화상으로 보면 1980년대 미국 남부 지역에는 복음주의 기독교가 아직 퇴색하기 전인 듯하다. 그러나 미국은 자유주의 신앙, 부흥신앙, 세속종교로 교회가 변질하였고 교회 강단에서조차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공공연히 설교하는 나라가 됐다. 한국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부흥한 한인 교회는 복음주의 기독교가 세속종교로 변질되는 흐름 속에서 성장했다. 세속주의 기독교는 엄밀히 말해서 그리스도교는 아니다. 이 땅에 소망을 두고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을, 예수를 우상처럼 숭배하는 지극히 자의적인 신앙에 가깝다. 극 중에서도 이와 같은 영적 배경을 엿볼 수 있다.

사진= 외신제공
사진= 외신제공

나는 기도했어요(I prayed)”

영화 <미나리>228(현지 시각) 7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자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의 7살 딸은 나는 기도했어요(I prayed)”를 외치며 아빠를 꼭 껴안았다. 딸을 안은 채 화면에 등장한 정 감독은 딸에게 들려주고 싶어 만든 가족 이야기이다. <미나리>는 진심의 언어(language of heart)를 그리고 있다. 서로가 이 사랑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웠으면 한다.”고 수상소감을 말했다.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시작으로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까지. 그리고 아카데미 투표권을 지닌 미국 감독, 프로듀서, 배우 조합이 발표한 최고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감독상, 여우조연상, 남우조연상, 외국어영화상을 포함해 총 6개 부문에 지명됐다. 15일에는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가 발표된다. <미나리>가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 주요 부문에서 후보로 지명될까?

1980년대를 배경으로 미국 남부 아칸소주에 한인 가정이 정착하는 과정을 그린 <미나리>를 연출한 리 아이작 정(한국명 정이삭·42) 감독은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1978년에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아칸소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아이작 감독은 그때의 선명한 기억들, 할머니의 실수로 집에 화재가 발생한 사건 등, 80여 개의 추억을 소환하여 시나리오를 쓰고, 기억의 서랍 속에 깊이 넣어 두었던 그때 그 시절의 일상을 드라마로 만들었다. “미국 내 이민 가정이 겪는 세대, 문화, 소통의 문제를 조명해 보고 싶어 어린 시절 기억을 되살려 봤다.”라고 한 아이작 감독.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로 가족을 응시하는 감독의 눈이 경이롭다.

곽은주 기자 cineeun6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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