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셰린의 밴시’... 모욕당한 신
'이니셰린의 밴시’... 모욕당한 신
  • 곽은주 기자
  • 승인 2023.03.19 17: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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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에서 본 하늘

아일랜드 배경의 가장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마틴 맥도나 감독(1970년생)의 바람은 옳았다. 영화 속 배경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아일랜드섬 이니셰린은 지상 낙원처럼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으로 황홀하다. 그런데 지상 낙원에 살아도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욕망은 숙명처럼 죄를 잉태하고 만다. 하나님이 되고 싶었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탐욕처럼.

'이니셰린의 밴시' 스틸컷, (왼쪽)'콜름' 역의 브렌단 글리슨, '파우릭' 역의 콜린 파렐,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 The Banshees of Inisherin>(2022)‘Inisherin’은 가상의 섬이다. 아일랜드어로 섬이란 뜻의 ‘Inish’와 아일랜드를 의미하는 ‘erin’을 합성하여 아일랜드의 섬이란 의미로 쓰였다. '밴시(Banshee)‘는 울음소리로 가족에게 죽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린다는 아일랜드 신화 속의 여자 유령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선 늙은 여자가 유령의 말을 전한다. 영화 제목 이네셰린의 밴시는 극 중에서 콜름이 작곡하는 신곡의 제목이기도 하다. 감독은 제목에 함축적인 의미를 담은 듯하다.

영화는 정확히 192341일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당시는 아일랜드 내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기다. 영국 자치령에 찬성하는 아일랜드 자유국과 북부를 포함한 완전 독립을 주창하는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사이에 치열한 내전이 1년간 계속되던 상황이었다. 아일랜드 내전은 1923410IRA(Irish Republican Army,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리암 린치가 국방군에 의해 사살된 뒤 사실상 종막을 향했다. 아일랜드 내전은 영화의 주요한 축을 이룬다. 이니셰린은 본토의 총포 소리가 들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영화에서는 본토 내전의 상황이 자주 언급된다. 주인공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것을 암시하는 긴장감 도는 영화 마지막 대화에서조차 내전은 공동의 화젯거리였다. 두 주인공 사이의 갈등이 마치 아일랜드 내전을 빗대어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오후 2시에 팝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인 파우릭(콜린 파렐)’. 그에게는 민속음악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인 절친 콜름(브렌단 글리슨)’이 있다. 영화는 느닷없는 콜름의 절교 선언으로 빚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들로 극이 전개된다. 남은 인생을 사색하고 작곡하며 살 결심한 콜름은 친구 파우릭을 밀쳐낸다.

자네의 한심한 얘기나 들으며 무의미한 수다로 시간 허비를 하고 싶지 않다는 콜름에게, 파우릭은 무의미한 수다가 아니라 즐겁고 평범한 수다라며 평범한 일상의 즐거움을 어필하지만 콜름의 헤어질 결심은 결연했다. 바이올린 현을 짚는 왼쪽 손가락 다섯을 잘라버릴 만큼.

'이니셰린의 밴시' 스틸컷, (왼쪽)'파우릭' 역의 콜린 파렐, '콜름' 역의 브렌단 글리슨,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이니셰린의 밴시' 스틸컷, (왼쪽)'파우릭' 역의 콜린 파렐, '콜름' 역의 브렌단 글리슨,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국이 삶의 터전인 마틴 맥도나 감독은 어린 시절 떠난 아일랜드 시골을 무대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감독과 주연 배우 콜린 파렐과 브렌단 글리슨이 모두 아일랜드 출신이다. 이런 태생적인 바탕이 찰떡같은 연기로 캐릭터에 잘 숙성된다.

다정함은 영원히 남지 않지만, 음악은 영원히 남는다고 반박하며, 콜름은 17세기 음악가 모차르트를 예로 들지만, 모차르트가 18세기 음악가라고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케리 콘돈)’이 정정해 준다. 콜름의 허세와 위선이 보기 좋게 무너지는 통쾌한 순간이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우물에 갇혀서 세상을 보는지 모른다.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에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가?”라고 책망했던 예수님의 질책은 지금도 유효하다. 인간이 원래 그렇다.

'이니셰린의 밴시' 스틸컷, '파우릭' 역의 콜린 파렐,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이니셰린의 밴시' 스틸컷, '파우릭' 역의 콜린 파렐,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장면 장면에는 교회를 비롯하여 동네와 집 안에 걸어 둔 십자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파우릭은 자신이 아끼는 당나귀 제니가 콜름이 던지고 간 손가락으로 질식사한 것에 분노하여, 주일 예배 후에 콜름 집을 불태운다. 무엇을 위하여 예배드렸을까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이 지점이 감독의 숨겨진 의도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감독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당신이 신을 믿는다고요? 그런데 당신은 전혀 변하지 않는군요라고. 감독은 영화를 통하여 신을 믿는다는 신앙인에게 보기 좋게 펀치를 날린다. 아무리 친한 친구였어도 자신의 욕망을 방해하거나 피해를 주는 자는 다 인 인간의 극단적인 이기심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에덴이란 지상 낙원에서조차 인간의 탐욕은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씁쓸하고 씁쓸한 영화의 뒷맛에도 불구하고 이니셰린의 목가적인 풍경은 평온하고 잠잠히 환하게 몸으로 스며든다.

곽은주 기자 cineeun6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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