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는 소녀’... 그 여름 방학은 빛났다
‘말없는 소녀’... 그 여름 방학은 빛났다
  • 곽은주 기자
  • 승인 2023.06.09 2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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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짓 하나가 탄생을 돕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무너졌다. 대책 없이 와락 눈물이 흘렀다. 눈물만이 우리가 인간이란 걸 증명한다고 했던가. 소녀의 얼굴 위로 나의 유년 시절이 점점이 흘러갔다.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황홀한 애틋함이여! 말 없는 소녀 코오트처럼 힘차게 달리면 돌이킬 수 없는 슬픔도 여름 햇빛처럼 환하게 빛날까.

'말없는 소녀' 스틸컷, 킨셀라 부인 아일린 역의 캐리 크로울리, 주인공 코오트 역의 캐서린 클린치, (주)슈아픽처스 제공
'말없는 소녀' 스틸컷, 킨셀라 부인 아일린 역의 캐리 크로울리, 주인공 코오트 역의 캐서린 클린치, (주)슈아픽처스 제공

아일랜드 영화 최초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 부문의 후보로 오른 콤 베어리드 감독의 <말없는 소녀, 영제: The Quiet Girl>는 아일랜드의 여류 작가인 클레어 키건의 중편 소설인 맡겨진 소녀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2009년에 출간된 맡겨진 소녀, Foster는 같은 해 데이비 번스 문학상을 수상했고, 타임스에서 뽑은 ‘21세기 최고의 소설 50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출간 이래로 아일랜드 교과 과정에 포함될 만큼 아일랜드 국민이 사랑하는 소설이다.

작가 겸 감독인 콤 바이레드는 2018년 여름 맡겨진 소녀를 읽고 즉시 영화로 각색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어린 소녀의 눈을 통해 전달되는 1인칭 현재시제의 서사였죠. 그것은 제게 완벽한 몰입감과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미 소설 안에 고유한 비주얼이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것 대부분은 이 소녀가 순간순간 보고 느끼는 것이었죠. 이야기의 서사적 긴장감은 줄거리에 지나치게 의존하기보다는 대부분 소녀의 경험에서 파생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영화화한다는 것은 대단히 매력적인 도전처럼 느껴졌어요라고 영화 제작 의도를 밝혔다.

'말없는 소녀' 스틸컷, 아일린 역의 캐리 크로울리, 코오트 역의 캐서린 클린치, 숀 역의 앤드류 베넷, (주)슈아픽처스 제공
'말없는 소녀' 스틸컷, 아일린 역의 캐리 크로울리, 코오트 역의 캐서린 클린치, 숀 역의 앤드류 베넷, (주)슈아픽처스 제공

감독의 의도대로 코오트(캐서린 클린치)의 시선으로 영화의 이미지가 생성된다. 아빠 댄(마이클 패트릭)의 자동차 안에서 바라보는 나무들의 모습, 아빠 차에 탄 낯선 여자의 분홍색 귀걸이, 킨셀라 부인 아일린(캐리 크로울리)과 처음 간 샘물에 비치는 자신과 킨셀라 부인의 모습 등등, 코오트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소소한 일상들(물론 코오트는 처음 겪는 큰 사건이지만)을 자신이 느낀 대로 기록한 소설의 문장은 감독의 눈을 통과하면서 영상 언어로 재탄생한다. 차 안에서 바라보는 잎이 축 늘어진 미루나무의 모습을 보며, ‘나무가 아픈가 보다고 생각하는 소녀의 감성을, 감독은 놓치지 않고 따가운 여름 햇살에 목마른 나무의 이미지로 포착한다. 1980년대의 아일랜드 시골 풍경과 풍경 속에 담겨 하나의 풍경처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전원교향곡처럼 순박하고 아름답다.

소설 맡겨진 소녀 1981년 아일랜드 시골 마을이 배경이다. 영화 역시 소설과 같은 시기를 담았다. 아일랜드는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교도이다. 주인공 코오트가 형제가 많은 이유도 짐작하건대 가톨릭 종교의 율법 때문일 것이다.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막내가 새로 태어나면 위에 형제를 친척 집에 맡기곤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던 모습이다. 특히 방학 때는 아이에 의사와 상관없이 시골에 사는 친가나 외가에 반강제로 맡겨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배고픈 시절이었다. ‘먹는 입 하나 줄이자는 슬픈 사연이 숨어 있는 가난한 시대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영화에서 코오트의 아빠 댄이 킨셀라 부부에게 코오트를 맡기면서 한 말이 참 아프게 기억된다. ‘아이들 먹이는 게 문제라고‘.

'말없는 소녀' 스틸컷, 코오트 역의 캐서린 클린치, (주)슈아픽처스 제공
'말없는 소녀' 스틸컷, 코오트 역의 캐서린 클린치, (주)슈아픽처스 제공

코오트는 여름 방학 동안 모친의 사촌 언니 집에 맡겨진다. 낯선 환경에서 마주하는 두려움 속에서 소녀는 친척 부부와 서로의 마음을 교감하는 법을 배우고 이웃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코오트는 친부모에게서 배우지 못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 소양을 킨셀라 부부 아일린과 숀(앤드류 베넷)을 통하여 배운다. 킨셀라 부부는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코오트를 보살피고 가르친다. 때론 자상한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코오트에게 든든한 배경이 된다.

그 덕택일까. 코오트는 킨셀라 부부와 보낸 여름 방학 동안 단단한 아이로 성장한다. 밤에 소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 하는 아이, 건초더미에 숨어 있는 아이,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아이, 급우의 우유를 허락 없이 몰래 따라 마시려던 소심한 아이, 집을 떠나는 불안감에 아빠 차 안에서 곱게 딴 양갈래 머리를 다 풀어 헤지며 불안감을 달래던 아이는 어느새 집안일도 척척 도울 줄 알고, 어려운 축사 일도 돕는 심성 바르고 단정한 아이로 성장한다. 또한, 자신이 달리기에 소질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여름 방학 동안 훌쩍 큰 키만큼이나 코오트는 마음도 예쁘게 성장한다. 예전의 겉도는 아이는 이제 그곳에 없었다.

사람이 오는 것을 마음이 오는 것이라 했던가. 코오트의 방문은 킨셀라 부부에게도 큰 축복의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마음을 살필 줄 아는 아이로 성장한 코오트에 여름이 눈부시게 빛난다.

곽은주 기자 cineeun6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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