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두 얼굴의 야누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두 얼굴의 야누스
  • 곽은주 기자
  • 승인 2023.07.06 1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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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음악과 영화음악 사이

20207691세로 이 세상을 떠난 엔니오. 그는 음악이 영화에 도움이 되고 영화 밖에서도 들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450여 편이 넘는 우아한 영화음악으로 관객에게 러브레터를 보냈다. 세상에서 처음 듣는 악기처럼, 12음계에 비밀을 경이롭게 들려준 러브레터는 첫사랑의 추억으로, 인생을 반추하는 기억의 멜로디로 관객의 감각에 또렷이 새겨졌다. 관객을 자유로운 영혼으로 무장해제 시키는 마력의 음악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트럼펫 연주자였던 부친의 뜻에 따라 11살에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트럼펫을 공부했던 엔니오. 그가 작곡을 처음 한 것은 7살 때였다. 작곡에 소질이 있는 것을 눈여겨본 음악원 교수의 권유로 작곡 공부를 시작했다. 1946년에 트럼펫 연주 전공으로 학위를 따서 음악원을 졸업하고,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작곡과에 재입학하여, 현대음악의 거장으로 꼽히는 작곡가 고프레도 페트라시에게 사사 받았다. 스승과 제자로 만난 페트라시와의 우정은 평생 이어진다. 1954년 음악원에서 작곡 전공 학위를 받고, 두 번째 음악원을 졸업한다. 그러나 생활인으로서 작곡가에 길은 쉽지 않았다. 부친 대신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그는 음악원 재학 시절부터 이탈리아에 주둔한 독일군과 미군 앞에서 트럼펫을 연주했는데, 먹고 살기 위하여 연주하는 것을 굴욕으로 여겼다.

영화음악 하기 전의 엔니오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약혼 시절 부인 마리아의 추천으로 이탈리아 국영방송국 RAI 취직했으나, 경력을 쌓을 수 없고 자신의 곡을 RAI에서 연주할 수 없다는 말에 반나절 만에 그만둔다. 물론 음악원 재학 시절부터 프리랜서로 꾸준히 RAI 편곡 일을 했었지만, 평생 정식 직장인으로 근무한 것은 오전 근무가 다였다.

엔니오는 1954년 무렵부터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했고, RAI의 라디오 음악과 TV 프로그램 음악을 편곡했다. 그 밖에 극단, 음반사 이탈리아 레코드 회사인 RCA에서 전속 편곡가로 활동하며 1960년대에 전위적인 음악을 표방한 새로운 협화음 즉흥 연주 그룹인 일 그루포를 결성하여 활동하는 등 실험성을 추구했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스틸컷, 엔니오 모리꼬네, ㈜영화사 진진 제공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스틸컷, 엔니오 모리꼬네, ㈜영화사 진진 제공

음악은 음을 쌓는 건축과 같다

당시 로마에서는 유명 작곡가들이 간단한 스케치를 해서 던져주면 이를 확장해 오케스트레이션을 하거나 노래 반주를 만드는 편곡 작업을 하는 젊은 도제들을 니그로(negro)‘라고 불렀는데, 이는 노예로 잡혔다는 뜻으로 스스로 비하하는 속어였다. 엔니오도 그랬다. 밤을 새워 편곡에 매달렸다. 그러던 중, 파산 직전의 RCA를 구한 곡이 엔니오가 편곡한 잔니 메치아의 일 바라톨로‘(1960)이다. 60년대 이탈리아 대중음악에 을 두드리고 둘리는 소리를 음악에 사용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곡은 대단한 성공을 거뒀고, 편곡자로서의 엔니오에게 명성을 안겨줬다. 그 이후 엔니오는 타자기 소리도 악기로 사용한다. 물방울 소리, 사이렌 소리, 휘파람 소리 등 다양한 생활 소음까지도 음악으로 사용했다.

당시 엔니오의 편곡은 충격이고 혁신이었다. 그는 고리타분하고 반주에 불과했던 편곡에 새로운 개성을 입혔다. 노래에 색채를 가미하고,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도록 청중을 사로잡았다.

엔니오! 멜로디가 아름다운 곡을 쓰렴”,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던 모친의 바람 덕이었던가, 청중은 엔니오의 곡에 매료당했다. 당시 유명 이탈리아 대중 가수인 잔니 모란디의 인 지노키오 다 테‘(1964), 미란다 마르티노의 치리비리빈‘(1964), 폴 앵카의 오니 볼타‘(1964) 등을 비롯한 많은 편곡을 했다. 존경하는 스승 페트라시의 가르침대로 대중음악에도 순수음악의 12음계에 충실한 편곡을 했다. 순수 음악가로서 품위를 지키고 싶었던 엔니오지만, 현실은 그를 대중 앞으로 내몰았다. 영화음악 의뢰를 마다할 수 없었다.

영화 같은 상업 매체에 음악을 써 주는 것을 매춘같은 거라고 영화음악을 비난하던 스승 페트라시의 눈이 몹시 부담스러웠을 텐데도 엔니오는 영화음악을 한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스틸컷, '황야의 무법자'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사 진진 제공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스틸컷, '황야의 무법자'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사 진진 제공

바흐와 스트라빈스키 그리고 팔레스트리나와 프레스코발디

방송국과 RCA에서 편곡하던 중에 루치노 살체 감독으로부터 영화음악 의뢰를 받는다. 이것이 엔니오가 영화음악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들어선 첫걸음이었다. 엔니오는 루차노 살체 감독의파시스트>(1961)를 통해 영화음악에 데뷔한다. 첫 작품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인지, 곧바로 1963년에 두 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한다. 두 편 모두 이탈리아에서 제작한 스파게티 웨스턴(1960~1970년대에 제작된 이탈리아산 저예산 미국 서부 개척 시대 영화로 주로 스페인에서 촬영됐다)이었다. 엔니오는 이 두 편에 예명을 쓴다. 젊은 엔니오는 그때만 해도 영화음악은 잠시 하는 생계 방편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순수 음악가로 자신의 이름을 존중하고 싶었으리라.

리카르도 블라스코, 마리오 카이아노 감독의 <텍사스 결투>(1963), 마리오 카이아노 감독의 <총은 말이 없다>(1963)를 본 세르조 레오네가 엔니오를 찾아온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세르조 레오네는 엔니오와 초등학교 동창생이었다.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1964)를 시작으로, 세르조의 유작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까지 무려 20여 년을 함께 협업했다.

엔니오는 바흐와 스트라빈스키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지만, 바흐 이전의 이탈리아 작곡가인 팔레스트리나와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엔니오가 작곡에 즐겨 썼다는 12음계의 층위나 대위법을 몰라도 괜찮다. 그에 음악은 전주 10초만 들어도 이미 매혹된다.

음악이 영화에 도움이 되고 영화는 음악에 도움이 되기를 바랬던 엔니오는 쉼표에서, 그 쉼 동안 듣는 사람의 생각에서 멜로디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쉼의 순간을 경청자의 마음과 생각이 자유로운 리듬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작곡가의 쉼표는 듣는 사람에게 상상의 음악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작곡가와 연주자 그리고 듣는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에 음악은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영화 장면에서의 긴장감을 절묘하게 표현한 그의 음악처럼, 영화와 음악은 서로 함께, 때론 불협하면서 극의 서스펜스를 고조시킨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스틸컷, 엔니오 모리꼬네, ㈜영화사 진진 제공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스틸컷, 엔니오 모리꼬네, ㈜영화사 진진 제공

절대음악과 영화음악의 접합

엔니오는 2007년 아카데미 공로상을, 2016년 타란티노 감독의 <헤이트풀8>(2016)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았다.

영화 <시네마천국>으로 유명한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엔니오의 음악 여정을 다큐멘터리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원제: Ennio>로 담았다. 이는 엔니오에 대한 헌정이자, 엔니오를 사랑한 팬들에게 주는 추억의 선물이다.

100살에 음악을 그만두겠다던 그는, 100살을 다 채우지 못하고 202076, 로마에서 91세로 음악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450곡이 넘는 영화음악과 100여 곡의 절대음악을 남겼다.

음악은 공기 중에 있고 그 광활한 파노라마 안에서 작곡가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던 그는, 지금 어디서 길을 찾고 있을까? 음악사에 자신의 이름이 남기를 소망하던 열정의 음악 청년 엔니오, 앞으로 200년 후에도 극장에서 토토와 알프레도‘, ’데보라의 테마가 연주되지 않을까?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곡처럼.

곽은주 기자 cineeun6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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