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살고 싶으면 침묵하라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살고 싶으면 침묵하라
  • 곽은주 기자
  • 승인 2023.08.31 19: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구원의 여정

러시아 영화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1938년 스탈린(1879~1953)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스탈린은 1937~1938년 사이에 대숙청을 벌였는데 당시 150만 명 이상이 체포되고 70만 명 이상이 처형됐다. 그 일을 주도한 비밀경찰(엔카베데, NKVD) 조직의 대위인 볼코노고프는 숙청의 총부리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고 조직을 도망친다. 위험천만한 탈출은 궁극에는 구원을 향하여 질주한다. 구원의 언약은 이루어질까.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스틸컷, 볼코노고프 역의 유리 보리소프, (주)슈아픽처스 제공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스틸컷, 볼코노고프 역의 유리 보리소프, (주)슈아픽처스 제공

“1937~1938년 사이 대도시 당과 지식인 집단에서 많은 사람이 사라졌다. 체포는 마구잡이로 이루어졌다. 수감자 대부분이 자신이 무슨 죄로 감옥에 있는지 영문을 몰랐다. 사람들은 한밤중에 누군가 문을 두드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 살았다, 영국의 역사학자 올랜도 파이지스는 속삭이는 사회(2007)에 당시 소련 국민의 공포가 어느 정도인지 상세히 기술했다. 당시 개인의 일기에는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자동적으로 생각한다. 지난밤에 체포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들은 낮 동안에는 사람을 체포하지 않으나 오늘 밤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당시 많은 이들이 엔카베데(비밀경찰)가 문을 두드릴 때를 대비해 가방을 꾸려 침대 곁에 두었다고 한다

스탈린은 정권을 구축하기 위해 비밀경찰 4만여 명을 동원해 자신에 대한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인물들을 제거했다. 이 숙청 대상에는 당시 군부 주요 인사들이 포함되어, 전체 소련 군부 장교 중 75%가 넘는 1천 명 이상의 장교가 처형됐다. 공포정치가 최고조에 달했던 1938년 소련 비밀경찰 조직 엔카베데(NKVD) 내부에도 숙청이 시작됐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스틸컷, 비밀경찰 합창단의 연습 모습, (주)슈아픽처스 제공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스틸컷, 비밀경찰 합창단의 연습 장면, (주)슈아픽처스 제공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부부 감독인 나탈랴 메르쿨로바와 알렉세이 추포프가 연출했다. 부부 감독은 비밀경찰 볼코노고프(유리 보리소프) 대위를 통하여 스탈린의 대숙청 참사가 개인의 영혼을 어떻게 피폐 시키는지 영화적 문법으로 긴장감 있게 보여준다. 영화를 제대로 보고 싶어서, 올랜도 파이지스의 스탈린 시대의 보통 사람들의 삶, 내면, 기억을 기록한 속삭이는 사회1, 2를 두서없이 훑어보고 영화를 봤다. 대충이라도 시대 배경을 알고 영화를 보니, 당시의 참혹한 현실이 가늠됐다. 장면마다 마치 역사 그림책을 보는 것처럼 현실감 있게 눈에 박혔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스틸컷, 1938년 소련의 비행선 장면,  (주)슈아픽처스 제공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스틸컷, 1938년 소련의 비행선 장면, (주)슈아픽처스 제공

우리가 심문하는 자들은 테러범도 간첩도 아니라던 직속상관(소령)은 결국 자신에게도 숙청의 시간이 온 걸 알고 창에서 뛰어내린다. 그때 계단으로 떨어진 상관을 본 볼코노고프는 충격을 받는다. 상관이 뛰어내린 창가에서 볼코노고프를 발견한 담당자는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 표시를 보였다. 순간, 다음 차례가 자신인 걸 직감한 볼코노고프는 본인이 고문한 피해자들의 서류를 청사 난간에 숨겨 놓고, 서둘러 비밀경찰 청사를 빠져나온다. 도움 청할 곳은 여자 친구밖에 없으나, 내막을 모르는 여자 친구는 자수를 종용한다. 도움 청할 곳이 없는 그에게 도처가 다 지뢰밭이다.

노숙인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볼코노고프는 공교롭게 비밀경찰에게 처형당한 시체를 묻는 일에 차출되는데, 그 시체 중에서 동료를 발견하고 놀란다. 자신 때문에 처형된 것을 직감한 볼코노고프는 극도의 죄책감에 시달리고, 죽은 동료의 환상을 보게 된다.

죽은 동료로부터 죽기 전에 회개하고, 최소한 한 명에게 용서를 받으면지옥이 아닌 곳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 환상에 사로잡혀 볼코노고프는 비밀경찰 청사에 숨겨둔 고문자 서류를 찾아오고, 무고하게 자신이 죽인 가족들을 찾아 나선다. 그들 중에 단 한 명의 용서를 받으면 지옥을 면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자신을 뒤쫓는 비밀경찰 상관(죽은 상관 후임 소령)은 더 집요했다.

자신이 고문한 가족들 모두를 비밀경찰 청사로 연행하여, 볼코노고프는 그들을 만날 수가 없다. 자신을 용서해 줄 사람이 없다는 절망에 싸인 볼코노고프는 가족 중에 국가의 적 없나요? 58조 판결받은 가족 없나요? 간첩, 반역, 테러 행위, 방해 공작, 반소련 선전 활동한 국가의 적 없냐고...” 소리 지르며 절규한다. 오직 자신이 구원받는 길은 용서밖에 없다고 믿기에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딸이 비밀경찰에 끌려간 한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며 마침내 깨닫는다. 자신이 죽으면 천국에는 없을 거라고. ‘구원의 욕망을 내려놓으니, 그의 영혼은 자유로워졌다. 볼코노고프 역의 유리 보리소프의 단단한 연기는 압권이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스틸컷, (주)슈아픽처스 제공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스틸컷, (주)슈아픽처스 제공

스탈린의 대숙청은 자국민뿐만 아니라 소수 민족에게도 이어졌다. 폴란드, 유대인, 라트비아인,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중국인, 고려인 등이 탄압을 받았다.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도 강제 이주를 당했다. 영화는 1938년 스탈린 피의 숙청이 배경인데, 2023의 대한민국 정치 상황이 자꾸 겹쳐서 보였다. 시대와 사는 모양새는 달라도 정치 권력의 야욕은 한결같구나 싶다.

영화를 연출한 부부 감독인 나탈랴 메르쿨로바, 알렉세이 추포프의 진정한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볼코노고프와 동료가 불렀던 러시아 군가 초원의 멜로디가 물색없이 자꾸 머릿속에서 윙윙거린다.

곽은주 기자 cineeun60@nate.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