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슬립’...고단한 잠의 노래
‘빅슬립’...고단한 잠의 노래
  • 곽은주 기자
  • 승인 2023.11.22 18: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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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는 있지만, 누구나 밤에는 잠을 잔다. 한낮의 기억을 차곡히 묻어놓고 고요히 흐르는 달무리처럼 평온한 잠은 우리의 하루를 위로한다. <빅슬립>은 가출 소년의 절실한 잠자리의 부재를 부각하며 집의 온기를 극대화한다. 한뎃잠을 자는 아이의 웅크린 모습이 초겨울 바람처럼 코끝이 아리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베란다 화분에 잠시 머무는 겨울 햇빛처럼, 영화는 비루하고 남루한 일상의 언저리를 무겁지 않은 선율로 변주한다.

'빅슬립' 스틸컷, (왼쪽)김기영 역의 김영성, 박길호 역의 최준우, 찬란 제공
'빅슬립' 스틸컷, (왼쪽)김기영 역의 김영성, 박길호 역의 최준우, 찬란 제공

김태훈 감독의 <빅슬립: Big Sleep>(2022)이 모티브가 된 드라마다. 기영(김영성)은 잠잘 곳이 없는 박길호(최준우)를 자기 집에 들인다. 17세 소년과 30대 후반의 젊지 않은 청년의 동거는 시작되지만, 둘의 동거는 순조롭지만은 않다.

<빅슬립>은 김태훈 감독이 10대 청소년을 위한 예술 강사로 일하던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감독은 “10대 청소년을 위한 예술 강사로 일하던 시절, 술에 취한 아버지를 피해 밤마다 길가를 헤매던 친구가 마음에 남아있었다라고 전하며, “<빅슬립>은 내가 만난 수많은 상처받은 아이들과 아무 대가도 없이 기꺼이 그들을 안아준 어른들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제작 의도를 밝혔다. 영화를 빌려 잠이 모자랐던 그 아이에게 깊고 따스한 잠을 선물해주고 싶었다던 감독의 마음처럼, 영화는 겨울밤의 아랫목처럼 상처받은 언 마음을 녹여준다.

'빅슬립' 스틸컷, (왼쪽) 김기영 역의 김영성, 박길호 역의 최준우, 찬란 제공
'빅슬립' 스틸컷, (왼쪽) 김기영 역의 김영성, 박길호 역의 최준우, 찬란 제공

한때, 길호처럼 가출하며 인생이 꼬였던 기영은 양아치로 지낸 지난 시절을 뒤로한 채, 식품회사 직원으로 성실히 하루하루 산다. 그렇지만 감히 회사의 폐기물 불법 매립을 신고할 용기는 없다. 새엄마랑 사는 부친에 대한 분노도 어느새 사그라지고, 모친이 유산으로 남긴 화분을 모친을 보듯 가꾸며 혼자 산다. 그러던 중에 뜻밖에 길호를 만나고, 길호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게 된다. 거칠고 투박한 그지만 길호만큼은 내칠 수가 없다.

폭력을 행사하는 새아버지를 피해 거리로 나온 길호는 어둠과 추위를 피할 장소를 찾아 헤매지만, 그가 쉴 곳은 동네 마당의 허름한 평상이 다였다. 오갈 곳 없는 길호에게 다가온 기영 아저씨는 엄마와 아버지를 대신하는 가족이 되고, 한집에 사는 식구가 된다.

'빅슬립' 스틸컷, 박길호 역의 최준우, 찬란 제공
'빅슬립' 스틸컷, 박길호 역의 최준우, 찬란 제공

영화 제목은 미국 레이먼드 챈들러의 동명 소설 빅슬립(1939)에서 따왔다. 감독은 빅슬립이 소설에서는 죽음을 의미하지만, 영화에서는 죽음같은 현실을 벗어나는 의미로 차용했다고 한다.

<빅슬립>은 김태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2022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김영성), 한국영화감독조합 메가박스상, 오로라미디어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하며, 한국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 준 영화다.

고만고만한 상업영화의 상투성에 식상한 관객이라면, 맑은 기운의 아침 호수 같은 독립영화에 마음을 열어 보면 어떨까.

곽은주 기자 cineeun6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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