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낙엽을 타고’...기다림의 해피엔딩
‘사랑은 낙엽을 타고’...기다림의 해피엔딩
  • 곽은주 기자
  • 승인 2023.12.18 1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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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람회 그림 같은 영화

단연코 아름답다.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한 전람회의 그림처럼, 영화는 예술적인 감흥으로 지극히 일상적인 밤거리의 공기조차도 예사롭지 않은 아우라를 뿜어낸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은행잎 한 잎 같은 떨림이 무덤덤한 마음에 살며시 내려앉아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영화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스틸컷, (왼쪽)홀라파 역의 주시 바타넨, 안사 역의 알마 포이스티, 찬란 제공
'사랑은 낙엽을 타고' 스틸컷, (왼쪽)홀라파 역의 주시 바타넨, 안사 역의 알마 포이스티, 찬란 제공

영화를 연출한 아키 카우리스마키(1957년생) 감독은 "<사랑은 낙엽을 타고, Fallen Leaves>(2022)는 로맨틱 코미디"라고 지난 제76회 칸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전한 바 있다. 시대는 변화하는데, 핀란드 노동자의 삶의 질은 나아지지 않은 상황을 빗댄 영화라는 의미로 말한 것 같다. 열악한 핀란드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 환경의 불합리한 현실은 과거와 다르지 않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내외적으로 겪는 불안한 상황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다행인 것은 궁핍하고 불안한 삶 속에서도 사랑은 여전히 보랏빛 희망으로 삶을 위로한다.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사실적으로 담은 영화란 점에서 로맨틱 코미디라 할 수 있지만, 사회 비판적인 풍자극으로 단정하기엔 영화는 무척 사색적이고 황홀할 만큼 회화적인 이미지로 채색됐다. 주인공에 내면의 심리를 대사보다는 적절한 음악으로 표현하는 감독의 서사가 그렇고, 배우의 의상과 일상의 자질구레한 소품조차도 조화로운 보색대비의 또렷한 색감으로 형형색색의 꽃보다 화려한 색채 향연을 선물한다. 어디 그뿐인가. 건물과 거리, 혹은 실내의 실루엣조차 황금분할 구도의 균형미로 예술적 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감독의 심미안에 그저 감탄이 절로 나온다.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전람회를 보는 것처럼, 영화 속 거리는 어느 순간에 호퍼의 <철길의 석양>(1929)이 중첩되고, 주인공이 깊은 생각에 잠겨 앉아 있거나,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상심한 마음의 쓸쓸함은 호퍼의 <밤샘하는 사람들>(1942)의 스산한 모습으로 애잔하게 파고든다.

턴테이블에 낡은 LP 음반을 올려놓고 예브게니 므라빈스키(1903~1988) 지휘로 듣는 차이콥스키의 비창’(영화에서는 1961년 레닌그라드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연주가 사용됨)처럼, 아코디언 연주가 곁들여진 '고엽'의 애잔한 음색처럼 영화는 고색창연하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스틸컷, (왼쪽)홀라파 역의 주시 바타넨, 후오타리 역의 얀 히티 아이넨, 찬란 제공
'사랑은 낙엽을 타고' 스틸컷, (왼쪽)홀라파 역의 주시 바타넨, 후오타리 역의 얀 히티 아이넨, 찬란 제공

라디오에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이 실시간으로 나오는데, 영화는 2024년 가을 핀란드 헬싱키를 배경으로 한 것 같다(안사가 일하는 주점 주방에 2024 달력이 걸려 있다).

때론 세밀한 정물화 같고 때론 고즈넉한 풍경화 같은 조용한 여자 안사(알마 포이스티). 반면 매사 무뚝뚝하고 투박한 남자 홀라파(주시 바타넨). 그들은 우연히 만난 가라오케에서 첫눈에 반하고 서로의 마음을 살피지만, 그러나 사랑은 쉽지 않다. 안사는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슈퍼마켓에서 해고당하고, 다시 찾은 일자리에서는 임금도 받지 못한다. 남자 역시 삶이 녹녹지 않다. 술 때문에 2번이나 해고를 당하고도 술을 달고 사는 홀라파. 일자리가 불안정해도 그는 핀란드를 떠날 생각이 없다. 변변한 숙소조차 없어도 술과 담배를 친구 삼아 산다. 그는 첫 데이트 때도 어색함을 못 이기고 커피에 술을 타 마신다. 카운터 거울로 그 모습을 본 안사는 못 본척하지만, 집으로 초대했을 때 재킷에서 술을 꺼내어 마시는 남자를 보고는 "당신은 좋지만, 술꾼은 싫어요"라고, 단호히 말한다. 무안했던 남자는 "난 잔소리꾼이 싫어요"라며 퉁명스럽게 내뱉고 그녀 집을 떠난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술을 끊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남자는 그녀를 만나기 위하여 술을 끊는다.

안사는 컴퓨터 사용료 10불이 없고, 돈이 없어서 며칠을 굶어도 극장에서 짐 자무시의 <데드 돈 다이>(2019)를 보며 마음껏 웃을 줄 아는 천진한 여자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은 후에는 유기견을 보살필 만큼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

'사랑은 낙엽을 타고' 스틸컷, (왼쪽)안사 역의 알마 포이스티, 홀라파 역의 주시 바타넨, 찬란 제공
'사랑은 낙엽을 타고' 스틸컷, (왼쪽)안사 역의 알마 포이스티, 홀라파 역의 주시 바타넨, 찬란 제공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거'라는 메시지를 전하듯, 아키 감독은 안사와 홀라파의 만남의 중심에 극장 풍경을 담았다. 서서히 소멸해 가는 극장의 운명이 안타까웠을까. 낡고 허름한 단관 극장의 향수를 소환하며 아키 감독은 장 뤽 고다르(1930~2022), 로베르 브레송(1901~1999)을 추억한다. 그뿐인가. 시인이자 시나리오 작가였던 자크 프레베르(19~1977)의 시로 유명한 '고엽'을 엔딩곡으로 마무리한다. 틈만 나면 찰리 채플린(1889~1977)에 대한 경외와 찬사를 주저하지 않던 아키 감독은 안사가 키우는 유기견 이름을 채플린으로 짓고, 관객에게 채플린을 상기시킨다.

그저 그런 늦가을 오후지만,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걸어가는 안사와 홀라파 그리고 채플린의 걸음에는 가을빛을 머금은 기쁨과 희망의 기운이 느껴진다.

곽은주 기자 cineeun6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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