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 75’...잔인한 죽음
'플랜 75’...잔인한 죽음
  • 곽은주 기자
  • 승인 2024.02.15 0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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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병 환자도 아니고 거동이 불편한 초고령도 아닌데 안락사를 선택한다. <플랜 75>는 국가가 75세 이상 국민의 죽음을 지원하는 정책을 빗대어 고령자 죽음의 문제를 다각적인 시선으로 짚어보는 디스토피아 영화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을까.

'플랜 75' 스틸컷, 미치 역에 바이쇼 치에코, 찬란 제공
'플랜 75' 스틸컷, 미치 역에 바이쇼 치에코, 찬란 제공

영화를 연출한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플랜 75, 원제: Plan 75>(2022)는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흑백 논리가 아닌, 회색지대에서 복잡한 인간의 섬세함을 다룬 영화로, 수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는 논쟁적인 영화라고, 지난 1월 내한하여 가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플랜 75>는 옴니버스 영화 <10>(2018)에 수록된 감독의 같은 제목의 단편 영화를 장편으로 확장한 작품이다. <10>은 다섯 명의 신예 감독이 각자의 시선으로 10년 후 일본의 모습을 참신하고 발칙한 상상으로 연출한 도발적인 화제작이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단편 <플랜 75>를 연출하기 전인 2017년에 이미 <플랜 75>을 장편으로 준비 중이었고, 장편의 5명의 인물 중 정책 담당 시청 직원 한 명을 주인공으로 단편을 만들었다. 개봉한 <플랜 75>는 단편에 등장하지 않았던 4명을 추가해서 본래 계획대로 인물 간의 관계를 다각적인 관점에서 묘사하여 현실감 있는 드라마로 연출했다.

물론 영화는 허구다. 그러나 예측 가능한 현실을 예견할 때는 섬찟하다. <플랜 75>가 그렇다.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 이상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가까운 미래의 일본. 청년층의 부담이 나날이 커지고 노인 혐오 범죄가 전국에서 이어지자 정부는 플랜 75라는 새로운 정책을 발표한다. ‘플랜 75는 75세 이상 국민이라면 별다른 절차 없이 누구나 신청할 수 있고, 신청자는 국가가 준비금 10만 엔(90만 원)을 덤으로 준다. 신청에서 사후까지 세세한 묘사가 마치 현실 정책처럼 느껴지며 죽음이 문 앞에 와있다는 참담한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플랜 75' 스틸컷, (왼쪽)히로무 삼촌 역의 타카오 타카, 히로무 역에 이소무라 하야토, 찬란 제공
'플랜 75' 스틸컷, (왼쪽)히로무 삼촌 역의 타카오 타카, 히로무 역에 이소무라 하야토, 찬란 제공

영화는 정책 실무 담당 시청 직원 히로무(이소무라 하야토)와 그가 담당한 신청자인 78세의 미치(바이쇼 치에코), 또 다른 신청자인 히로무의 삼촌(타카오 타카), 그리고 신청자들의 변심을 방지하는 24시 콜센터 상담사 요코(카와이 유미)와 사후 유품 처리사인 필리핀 이주노동자 마리아(스테파니 아리안) , 5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플랜 75’의 정책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종결되는지 TV 홍보물처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영화의 중심에 78세의 미치가 있다. 78세의 나이에 집도 돈도 먹고살 일자리도 없어 죽음을 선택한 미치. 죽으러 가는 생의 마지막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상은 고요히 흐른다. 낡은 아파트에도 아침햇살은 눈부시고, 아이들은 여전히 뛰어논다. 인생은 흘러가는 구름처럼 흘러간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죽음은 그녀를 놓아준다. 운명처럼. 약물 주사를 맞고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에 옆 침대 노인의 임종을 보게 된 미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도망치듯 죽음의 순간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집을 향하여 무작정 걷고 걸었다. 어느 순간 지친 발걸음을 옮기며 마주한 석양은 찬란하게 눈부셨다. 남루한 삶의 멍에를 잠시 내려놓고 오롯이 아름다운 자연의 생명력에 마음을 여는 미치. 젊음도 사랑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됐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외마디 비명처럼, 미치는 한 소절 한 소절 세상을 향하여 나지막이 자신의 노래를 들려준다. 그 옛날 연인을 기다리던 사과나무 아래서의 설레는 행복처럼, 지는 태양의 붉은 노을은 그녀를 다시 살도록 다독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미치가 부르는 노래는 영화의 백미다. 아름다운 비애감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집도 돈도 직장도 없고, 가족도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생명은 그것들보다 소중하므로. 겨울나무에 푸른 봄기운이 물오르듯, 주인공은 삶에 대한 가냘픈 의지로 새로운 출발을 하리라. 어둠과 절망의 늪에서 희망의 아름다운 황혼을 본 그녀에게 의식주 문제가 더 이상 발목을 잡지 않을 것이다. 고단한 일상이 그녀를 기다린다 해도 이제는 맥없이 속절없이 무너지지 않으리.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절망의 순간에 그녀는 살아야 할 미세한 생명력을 보았으므로.

'플랜 75' 스틸컷, (왼쪽)미치 역에 바이쇼 치에코, 콜센타 상담사 요코 역에 카와이 유미, 찬란 제공
'플랜 75' 스틸컷, (왼쪽)미치 역에 바이쇼 치에코, 콜센타 상담사 요코 역에 카와이 유미, 찬란 제공

영화의 주제는 무척 건조하고 무겁지만, 주인공 미치에 내면을 응시하면, 영화적 아름다움을 목도하게 된다. 볼품없고 보잘것없는 살림살이에서 궁색함이 묻어나지만, 풍족하지 않은 삶에 자족하며 늘 감사할 줄 아는 그녀의 넉넉한 마음 씀씀이에 경외심마저 든다. 이는 분명 배우의 연기력에서 비롯된다. 미치 역을 한 바이쇼 치에코는 1941년생의 일본 국민배우이자 가수다. 82세의 나이에 미치 역을 열연했다.

감독은 빛과 그림자의 긴 여백, 창을 통한 안과 밖에 풍경의 이질감을 최대한 활용하여 주인공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과 또한 희망의 미래를 암시적으로 표현한다.

모른 척할 수 없는 고령사회에 빈곤 노년의 죽음. 설령 폐기 처분할 수 있는 소모품 취급을 받아도, 힘겹고 곤궁해도 그들의 선택지가 죽음이 아닌 삶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애틋한 심정이 절절한 영화다.

곽은주 기자 cineeun6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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