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행자', '사탄탱고'의 공간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행자', '사탄탱고'의 공간
  • 곽은주 기자
  • 승인 2024.05.14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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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회 전주국제영화제가 51일부터 10일까지 전주 영화의거리 일대에서 개최됐다. 축제는 끝났지만, 축제의 잔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처럼 영화 장면들이 뒤섞여 환상처럼 저녁 창가에 머물다가 사라지곤 한다. 때론 헝가리 시골 농장을 걷는 행자를 상상한다. 아코디언 반주에 맞춰 탱고를 추는 취객들 사이를 느리게 걷는 행자는 어떤 모습일까. 도대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꼬리를 물고 영화 속 시간과 공간을 부유한다. 행자가 걷던 마르세유 지하철 계단에 반짝이며 떠돌던 먼지처럼.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차이밍량 행자 연장 특별전', '모래' 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차이밍량 행자 연장 특별전', '모래' 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25회 전주국제영화제의 가장 큰 관심은 차이밍량의 행자 연작 특별전이었다. 10편의 행자 연작 상영은 물론 마스터클래스와 전주대담, 그리고 행자 퍼포먼스 콘테스트 이벤트까지 차이밍량(1955년 말레이시아 쿠칭 출생) 감독과 이강생(1968년 대만 출생) 배우는 짧은 일정 동안 관객과 함께했다.

10편의 행자 연작 중 단편인 <행자, Walker>, <무색, No Form>(2012), <몽유, Sleepwalk>92012)<금강경, Diamond Sutra>(2012), <물 위를 걷기, Walking on Water>(2013), <무무면, No No Sleep>(2015) 등을 3편씩 묶고, 중편 <서유, Journey to the West>(2014), 장편 <모래, Sand>(2018), <, Where>(2022), <무소주, Abiding Nowhere>(2024) 등을 각각 3회씩 상영했다. 그러나 영화제 시작 전에 이미 행자 연작은 매진됐다. 미처 예매를 못 한 관객은 영화제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며 눈이 빠지게 예매 취소 표를 기다렸으나 표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영화제 측은 행자 연작 10편을 모두 관람한 관객에게는 특별 선물까지 증정하는 이벤트까지 진행하면서, 행자 연작 전편 보기에 도전하는 관객도 적지 않았다. 오전 10301회 차 상영관에서조차 빈자리는 찾기 힘들었다. 도대체 관객은 '행자'에서 무엇을 보고 싶었고, 무엇을 본 것일까.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행자 퍼포먼스 콘테스트' 참가자와 이강생 배우,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행자 퍼포먼스 콘테스트' 참가자와 이강생 배우,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행자 연작은 중국 고전 서유기의 삼장법사에게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품이다. 삼장법사는 실존 인물로, 12세 때 출가하여 중이 된 현장(601~664)이 주인공이다. 그는 29세 인도로 유학길을 떠난다. 40명의 제자가 동행했으나, 결국 그 혼자만이 인도에 도착했고, 후에 귀국하여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을 번역한다.

차이밍량은 마스터클래스에서 "30대 초에 현장의 전기를 읽고 전율을 느꼈다"고 밝혔다. 정보도 없고 교통수단도 없던 시절에 당나라에서 인도까지 걸어서 사막을 건넜다는 사실이 신비롭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로 제작되기까지는 오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영화로 제작된 배경에는 이강생 배우가 있었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차이밍량 행자 연작 특별전', '서유' 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차이밍량 행자 연작 특별전', '서유' 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전주대담시간에 차이밍량은 '행자'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들려줬다. 2011년 타이베이 국립극장으로부터 '모노드라마' 형식의 연극 연출 제안을 받고, 3명의 배우에 3개의 모노드라마를 무대에 올렸던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차이밍량은 이강생에게 자신에게 주요한 영향을 준 3명의 인물(감독의 부친, 이강생, 현장법사)을 모노드라마로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텅 빈 무대에서 이강생이 상상하지 못하게 천천히 걷는 걸 보고 놀라웠다. 음악도 대사도 무대장치도 없는데, 사람 하나가 공간을 걷는 시간 동안에 온몸에 전율이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이강생이 걷는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행자 연작이 시작됐다첫 작품은 휴대폰 광고로 제작된 단편 <무색 No Form>이었다. 그 후 타이베이, 홍콩, 말레이시아 쿠칭, 파리, 워싱턴 D.C. 등 각기 다른 도시를 배경으로 붉은 승복을 입은 행자(이강생)가 맨발로 느리게 걷는 모습을 담았다. 11번째 작품은 내년에 전주에서 촬영한다.

지난 2007년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 마스터클래스에서 피터 그리너웨이(1942년 영국 출생)"영화는 움직이는 그림을 극장에 거는 것"이라고 영화를 정의한 바 있다. 그의 영화에 관한 정의는 차이밍량의 행자 연작에서 유의미하게 입증된다. 이미지에 기반을 둔 영화가 언제부터 '대사''이야기'의 노예로 전락했을까. 영화가 스토리텔링에 한정되지 않는 이미지의 예술임을 10편의 행자는 또렷이 보여준다. 차이밍량은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이미 관객들이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걸 싫증을 내고 영화 보길 포기한 시대가 도래했다. 영화와 영화관은 지금 개혁이 필요한 시대라고 말했다. 그는 덧붙여, "큰 화면으로 정해진 구도 안에서 볼 수 있는 영화는 그 자체로 마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영화가 이미지의 예술임을 입증하는 행자 연작은 아무 사건도 없다. 그저 한 발 한발 걷는다. 그리고 행자가 걷는 타이베이, 홍콩, 말레이시아 쿠칭, 파리, 워싱턴 D.C.의 공간이 또 다른 주인공으로 스크린을 압도하며 프레임을 장악한다. 영화적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는 그 순간, 무슨 연유에선지 벨라 타르(1955년 헝가리 펙스 출생)<사탄탱고>(1994)가 강렬하게 떠올랐다. 가을 장맛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질척한 습지를 걷는 행자를 상상해 보라.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벨라 타르의 '사탄탱고' 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벨라 타르의 '사탄탱고' 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전주에서 돌아온 후 <사탄탱고>를 다시 봤다. <사탄탱고>는 전주영화제 1회 초청작으로 당시 관객을 뒤집어 놓았던 대작이다. 435분의 긴 상영시간 때문에 단 한 번의 심야 상영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했고, 그 후 전주국제영화제는 2008년에 벨라 타르 회고전으로 <사탄탱고>를 역시 심야 상영했었다. <토리노의 말>(2012)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벨라 타르(1955년생)가 차이밍량의 행자 연작으로 이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두 감독 모두 인간의 이야기보다 날씨와 풍경을 담은 시간과 공간에 공을 들이는 연출 스타일 때문일 터. 2014년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마스터클래스에서 벨라 타르는 진정한 영화는 시나리오가 아닌 로케이션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배우들과 함께 그 로케이션에 있으면서 상황이 나온다고 말했는데, 그 말에 가장 어울리는 작품이 행자 연작이란 생각이 든다.

행자는 대사가 없다. 대사가 없어도 영화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무척 아름답다. 움직이는 미술관의 그림을 관람하는 것처럼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이다. 차가운 벽 공간에 놓여있는 밥솥에서 가열 차게 뿜어나오는 밥 익는 풍경의 이미지는 허기를 느낄 만큼 구수한 밥 냄새를 기억시키고, 때론 한적한 해변에서 들려오는 거친 파도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풍경을 보는 눈을 열어 준다. 듣는 귀와 보는 귀, 보는 눈과 듣는 눈이 열리는 색다른 영화적 순간이다.

이제 26회 전주국제영화제를 기다린다. 30회를 넘기기 전에 벨라 타르와 차이밍량의 작품을 함께 전주에서 볼 수 있기를 소망하며 꿈꾼다.

곽은주 기자 cineeun6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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