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규환. 국가도 공권력도 없다. 그야말로 각자도생해야 하는 재난 상황이 발생한다.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으로 초토화된 서울에 유일하게 보전된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다. 살아남은 안도감도 잠시, 생존의 투쟁은 처절하고 인간의 존엄은 무참히 무너진다. 낙원의 길은 좀처럼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다. 총체적 난국이다.
아파트가 뭐길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를 희화화하는 블랙 코미디다. 아파트 평수가 사회의 계층과 신분을 갈라치는 대한민국에 이보다 더 큰 반전이 있을까.
엄태화 감독은 아파트를 소재로 한 김숭늉 작가의 웹툰『유쾌한 왕따』의 2부 '유쾌한 이웃'을 을 읽고 흥미를 느껴 제작사에 영화를 제안했다고 한다.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엄태화 감독에게 아파트는 고향이자 추억의 공간일 터. ‘주거 공간에 재난이 발생한다’는 설정으로 출발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영화 제목은 박해천의 책 제목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차용했다. 이보다 더 좋은 제목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아파트가 삶의 양식과 사고방식까지 지배하는 사회에서 중산층 아파트 단지의 단 한 동만이 안전한 주거 공간이라면, 그 안에 사는 주민은 어떤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을 보여 줄까.
영화가 시작되면, 근현대 아파트 변천사가 다큐멘터리처럼 짤막하게 소개된 후에 드라마가 시작된다. 예측할 수 없던 대지진으로 서울의 모든 건물은 무너지고 폐허가 됐지만, 변두리 ‘황궁’ 아파트 103동만 온전한 채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소문을 들은 외부 생존자들이 황궁 아파트로 몰려들자 위협을 느낀 입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주민 대표 영탁(이병헌)을 중심으로 외부인을 몰아낸다. 외부인을 물리적으로 몰아내고 아파트는 콘크리트 속의 유토피아처럼 평화를 찾은 듯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주민 규칙을 만들고 어렵사리 안정적인 공동생활을 이어가지만, 일상은 갈수록 팍팍하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천국과 지옥의 교차로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롭다. 창밖엔 찬 겨울바람이 몰아치고, 불 꺼진 거실의 실내는 춥고 배고픈 나날이다. 다른 세상은 없는 것처럼 절망적이다.
주민 대표 영탁으로 이병헌과 신혼부부 민성과 명화로 박서준과 박보영, 부녀회장 금애로 김선영, 주민 혜원과 도균으로 박지후, 김도윤이 출연한다. 그 외 배우들의 열연이 극을 현실감 있게 표현하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배우만큼 중요한 요소로 윤수일의 히트곡 ‘아파트’가 메타포처럼 주요 장면에 중심 배경이 된다. 1982년에 발표된 곡이니 41년 전 노래다.
새해를 맞는 주민 잔치에서 이병헌이 목청껏 부르던 ‘아파트’와 엔딩 크레딧에 흐르던 박지후가 부른 ‘아파트’는 분명 상반된 감정을 은유한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멀고 낯선 거리처럼, 긴 여운을 준다.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
현실 재난을 재밌다고 할 사람은 없지만, 드라마는 가능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밌다. 극의 촘촘한 밀도와 박진감이 영화적 긴장과 재미를 준다. 감독이 공들인 시간의 수고가 느껴지는 역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