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분명한 것은 없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분명한 것은 없다
  • 곽은주 기자
  • 승인 2024.04.03 15: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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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겨울 숲. 푸른 밤하늘의 창백한 달빛에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의 스펙트럼이 숲의 적막을 뒤흔든다. 단조롭고 나른한 산골의 겨울 풍경이건만, 그 풍경의 내면은 불협화음으로 팽팽한 긴장을 일으킨다. 자연의 어두운 그림자 앞에 한낱 깃털처럼 가벼운 인간이여!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왼쪽) 타쿠미 역의 오미카 히토시와 그의 딸 하나 역의 니시카와 료, 그린나래미디어(주) 제공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왼쪽)타쿠미 역의 오미카 히토시와 그의 딸 하나 역의 니시카와 료, 그린나래미디어(주) 제공

도쿄에서 2시간쯤 떨어진 산골 마을. 글램핑(매혹적인 뜻의 글래머러스와 캠핑의 합성어)장이 건설된다는 일로 마을은 술렁인다. 경제 논리로 주민을 설득하는 회사 직원에 맞서 글램핑장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주민들. 심부름센터를 자처하는 타쿠미(오미카 히토시) 또한 글램핑장이 들어서는 것이 못마땅하다. 그곳은 사슴이 지나다니는 길이기 때문이다.

농한기의 단조로운 일상이건만, 타쿠미는 마을의 돌봄 교실을 다니는 딸 하나(니시카와 료)의 하교 픽업을 제대로 못 해준다. 건망증 때문이다. 딸은 또래들과 놀며 아버지를 기다리는 대신 혼자 집에 가는 쪽을 택한다. 아이가 혼자 다니기엔 다소 위험한 산속을 지나야 하는데 말이다. 아이는 굴밤나무, 소나무, 산벚나무, 오갈피나무, 층층나무들을 길동무 삼아 걷는 중에, 다행히 자신을 뒤쫓아 온 아버지를 만난다. 그리고 총에 맞아 죽은 부패한 어린 사슴의 사체를 보게 된다. 그 충격이었을까. 그날 아이는 꿈속에서 사슴 가족을 본다. 그 후로 호기심에 사슴이 지나다니는 길을 종종 기웃거린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딸 하나 역의 니시카와 료, 그린나래미디어(주) 제공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딸 하나 역의 니시카와 료, 그린나래미디어(주) 제공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Evil Does Not Exist>(2023)는 평면적으론 자연과 인간 공존의 규칙을 설득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연의 이치를 빗대어 인간의 허약한 실체에 초점을 둔 것 같다.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 대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표현한 것은 아닐까.

투명한 시선으로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감독의 일관되고 선명한 힘은, 분명 빈틈없이 기획한 영화의 틀을 부단히 실행한 결과물이자 타고난 재능일 터. 건조한 분위기에 걸맞게 간결한 서사의 여백은 강렬한 이미지의 여운을 생성하며, 그 여운의 정점에서 영화는 끝난다. 다만 과장된 사운드트랙의 화려한 음색이 영상의 비장하고 잔잔한 아름다움을 방해하며, 음악이 영상을 심하게 침해한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하지 못하는 영화의 주제를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왼쪽)클램핑장 담당자 마유즈미 역의 시부타니 아야카, 타카하시 역의 코사카 류지, 그린나래미디어(주) 제공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왼쪽)클램핑장 담당자 마유즈미 역의 시부타니 아야카, 타카하시 역의 코사카 류지, 그린나래미디어(주) 제공

무엇보다 끝 장면의 충격은 관객에게 첫 장면부터 영화를 다시 차근히 복기하는 무한한 탐색의 재미를 선사한다. 특히 자동차 신에서 보여준 일련의 장면은 영화의 맥락을 환기시킨다. 딸 하나를 픽업하지 못한 채 타쿠미가 왔던 길을 뒤돌아 가는 장면, 글램핑 건설 회사 직원의 달리는 자동차 백미러 장면, 하나를 찾아 나선 우동집 부부의 달리는 자동차의 배경은 뒤를 돌아보라!’는 신호처럼, 일관되게 앞을 향하여 전진하는 영화의 방향을 카메라는 역행한다. 차창 밖 풍경이 점점이 뒤로 물러서는 모습은 현실과의 거리감을 확장하며 결말의 서사를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이 세상을 뒤로하고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홀연한 쓸쓸함이라고 할까. 어디 그뿐인가. 감독은 작정하고 결말의 비밀을 작은 퍼즐 조각처럼 곳곳에 슬쩍 던져 놓았다.

그리고 예상 밖의 황망하고 기묘한 결말의 시퀀스로 숨겨진 인간의 본질을 훅! 찔러본다. 붉은 피 한 방울이 뚝 떨어지는 선명한 이미지의 섬찟함이여. 암울하고 매혹적이다겨울밤의 차가운 기운의 안개와 음산한 어둠에 휩싸인 숲의 거친 숨소리 위로 교교히 흐르는 창백한 달빛이여.

곽은주 기자 cineeun6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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