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가 꼭 갖춰야 할 능력이 있다.
바로 시간 엄수! 데드라인 지키기.
물론, 방송의 장르가 다양한 만큼 그 분야에서 요구하는 능력은 조금씩 다 다르지만
원고가 없으면 방송 자체가 펑크날 수가 있으니
사전에 원고가 나와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생방송 시작 전 천재지변이 일어나
이미 준비한 원고를 모두 엎고, 새로 써야 할 때도
방송 전까지 어떻게 해서든 원고는 만들어내야 한다.
지금 밖에는 물난리가 나서 난린데.
한가하게 ‘취미는 뭐예요?’ 식으로 방송을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때문에 방송원고는 잘 쓰는 것보다는 시간 안에 내놓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런데. 일부 후배작가들 중에는 시간 지키기가 영 안 되는 친구가 있다.
‘00까지 원고를 보내’라고 하면 함흥차사.
왜 안 보냈냐고 다그치면
‘바빠서 못했다’, ‘좀 더 잘 쓰려고 하는데 안 써진다’고 핑계를 댄다.
그럼, 난 그 즉시 그 후배작가에 대한 기대를 접어버린다.
어떤 대학교 교수는 늦게 제출한 리포트는 아예 보지도 않고,
점수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시간을 지키지 않은 과제는 그 내용의 신뢰성마저 잃어버린 것이기에…
나 역시 시간을 지키지 않고 나중에 준 원고치고 괜찮은 건 거의 못 봤다.
설령, 아주 완벽한 원고가 나왔다고 해도
방송이 다 끝나고 난 뒤 나오는 꼴이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바빠서’라는 핑계를 대며 제시간에 하지 못하는 것은
‘나 능력 없어요’, 혹은 ‘나 무책임해요’라는 말과 같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바쁘면 그 일을 하지 못할까? 사실 이 세상에 바빠서 하지 못하는 건 없다.
정말 물리적 시간이 없어서 못 하는 거라면 능력 밖이니 애초에 맡지 않아야 하는 게 옳다.
그런데, ‘바빠서’라고 핑계를 대며 못한다는 건…
‘흥미 있는 걸 먼저 하느라 일은 뒷전이었어요.’
‘저는 시간 관리가 잘 안 돼요.’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능력이 없네요.’라는 말과 다름 아니다.
할 능력도 없는 데다가 자신의 능력까지 과신한 것을…
괜히 바쁘다는 핑계를 대는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 뭐가 조금 나아지나?
그렇다고 무능력과 무책임함이 감춰지는 건 아니다.
친구 사이나 비즈니스 관계에서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만남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친한 친구가 이런 소릴 하며 거드름을 피우면
대뜸 ‘밥 먹을 시간도 먹냐?, 똥도 안 싸냐? 바쁘다면 좀 있어 보이냐? 잔말 말고 나왓!!’…
대놓고 직설적으로 말해버린다.
그런데, 그냥 아는 사람이 바쁘다고 하며 시간을 잡지 못하면.
‘저 사람은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구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구나’ 여기고
나도 마음을 접게 된다.
바쁘다고 하면 괜히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일을 많이 맡아 능력자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보기엔 전혀 아니다.
바쁜 건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시간이다.
능력과 관심이 있다면 바빠도 다 할 수 있고,
능력과 관심이 없다면 시간이 남아돌아도 할 수가 없다.
‘바쁘다’는 그 한 마디는 일에서는 자신을 무능력, 무책임함을 보여주고,
관계에서는 상대방에게 무관심을 보여주면서 상처만을 줄 뿐이다.
때문에 웬만하면 난 ‘바쁘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에서 무능력자로 보이기 싫고, 관계에서도 무관심자로 보이고 싶지 않기에…
정말 물리적으로 밥 먹을 시간이 없을 때조차도 난 겉으론 언제나 한가하다.
마치, 수면 아래에선 미친 듯이 자맥질을 하지만
물 위에선 유유하게 떠다니는 한 마리의 백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