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다는 핑계
바쁘다는 핑계
  • 정은경 방송작가
  • 승인 2021.11.12 10:38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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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가 꼭 갖춰야 할 능력이 있다.
바로 시간 엄수! 데드라인 지키기.

물론, 방송의 장르가 다양한 만큼 그 분야에서 요구하는 능력은 조금씩 다 다르지만

적어도 내가 했던 생방송 프로그램에선 원고 제출은 칼이어야 한다.
원고가 없으면 방송 자체가 펑크날 수가 있으니
사전에 원고가 나와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

생방송 시작 전 천재지변이 일어나
이미 준비한 원고를 모두 엎고
, 새로 써야 할 때도
방송 전까지 어떻게 해서든 원고는 만들어내야 한다
.
지금 밖에는 물난리가 나서 난린데.
한가하게 취미는 뭐예요?’ 식으로 방송을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때문에 방송원고는 잘 쓰는 것보다는 시간 안에 내놓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런데. 일부 후배작가들 중에는 시간 지키기가 영 안 되는 친구가 있다.
‘00
까지 원고를 보내라고 하면 함흥차사.
왜 안 보냈냐고 다그치면
바빠서 못했다’, ‘좀 더 잘 쓰려고 하는데 안 써진다고 핑계를 댄다.
그럼, 난 그 즉시 그 후배작가에 대한 기대를 접어버린다.

어떤 대학교 교수는 늦게 제출한 리포트는 아예 보지도 않고,
점수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시간을 지키지 않은 과제는 그 내용의 신뢰성마저 잃어버린 것이기에
나 역시 시간을 지키지 않고 나중에 준 원고치고 괜찮은 건 거의 못 봤다.
설령, 아주 완벽한 원고가 나왔다고 해도
방송이 다 끝나고 난 뒤 나오는 꼴이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

바빠서라는 핑계를 대며 제시간에 하지 못하는 것은
나 능력 없어요’, 혹은 나 무책임해요라는 말과 같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바쁘면 그 일을 하지 못할까? 사실 이 세상에 바빠서 하지 못하는 건 없다.
정말 물리적 시간이 없어서 못 하는 거라면 능력 밖이니 애초에 맡지 않아야 하는 게 옳다.

그런데, ‘바빠서라고 핑계를 대며 못한다는 건
흥미 있는 걸 먼저 하느라 일은 뒷전이었어요.’
저는 시간 관리가 잘 안 돼요.’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능력이 없네요.’라는 말과 다름 아니다.

할 능력도 없는 데다가 자신의 능력까지 과신한 것을
괜히 바쁘다는 핑계를 대는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 뭐가 조금 나아지나?
그렇다고 무능력과 무책임함이 감춰지는 건 아니다.

친구 사이나 비즈니스 관계에서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만남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친한 친구가 이런 소릴 하며 거드름을 피우면
대뜸
밥 먹을 시간도 먹냐?, 똥도 안 싸냐? 바쁘다면 좀 있어 보이냐? 잔말 말고 나왓!!’
대놓고 직설적으로 말해버린다.
그런데, 그냥 아는 사람이 바쁘다고 하며 시간을 잡지 못하면.
저 사람은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구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구나여기고
나도 마음을 접게 된다
.

바쁘다고 하면 괜히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일을 많이 맡아 능력자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보기엔 전혀 아니다.

바쁜 건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시간이다.
능력과 관심이 있다면 바빠도 다 할 수 있고,
능력과 관심이 없다면 시간이 남아돌아도 할 수가 없다.
바쁘다는 그 한 마디는 일에서는 자신을 무능력, 무책임함을 보여주고,
관계에서는 상대방에게 무관심을 보여주면서 상처만을 줄 뿐이다.

때문에 웬만하면 난 바쁘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에서 무능력자로 보이기 싫고, 관계에서도 무관심자로 보이고 싶지 않기에
정말 물리적으로 밥 먹을 시간이 없을 때조차도 난 겉으론 언제나 한가하다.
마치, 수면 아래에선 미친 듯이 자맥질을 하지만
물 위에선 유유하게 떠다니는 한 마리의 백조처럼
.

삽화/ 박상미
삽화/ 박상미

 


정은경 방송작가 pdirow@naver.com

정은경 방송작가

20여 년 동안 시사, 교양 분야의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다.
주요 프로그램으로 CBS <변상욱의 시사터치>, EBS <김민웅의 월드센터>, <생방송EBS FM스페셜> KBS <보고싶은얼굴, 그리운 목소리>, <월드투데이>, <라디오주치의> tbs <서울 속으로> 등 다수가 있고, 현재는 TBS <우리동네라디오>를 시민제작자와 함께 만들고 있다.
치열한 방송현장에서 일하면서 나만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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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자 2021-12-02 15:17:40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팍 찔리는 것은 뭘까요?^^ 나도 의연중 바쁘다는 핑계도 댔었고, 정말 바쁠때도 바쁘다고 했었지만, 생각해 보면 충분히 바쁜척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시카 2021-11-16 13:43:40
바쁜 사람들을 보면 괜히 부러웠는데 이제는 그렇게 생각 안하려구요. 저도 남들에게 여유를 보이고 싶네요. 그래야 더 자신감 있게 보이는 것같고ㅎㅎ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해요~~

백혜경 2021-11-13 09:53:06
나자신을 다시
돌아보고 반성하게
하네요 ~
좋은글 감동받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