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이하는 여정. 시간의 연속성에 있는 우리들은 이런 삶의 사이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거꾸로 가는 삶이라면?
오래된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선 당연히 생각했던 시간의 흐름이 완전히 반대로 간다.
늙게 태어나서 노인을 먼저 경험하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젊어지고, 어려지고...
이 영화를 떠올리면 늙음과 젊음,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이 역으로 가든, 순방향으로 흘러가든 태어나고 죽는 것은 차이가 없으니 젊음과 늙음이, 삶과 죽음을 두부 자르듯 나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간 기다린다. 뭔가를 할 수 있는 좋은 때가 찾아올 거란 환상을 가지고...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 더 좋은 기회가 올 거라고 믿고 젊은 시절을 허비해 버린다.
하지만 시간이 거꾸로 가는 벤자민의 경우엔 좋은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젊은 시절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늙은 시절을 허비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젊은 시절은 허비했다고 하면서 늙은 시절은 허비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젊은 시절은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되는 좋은 시절이고, 늙은 시절은 시간을 허비해도 되는 별 볼 일 없는 시절이라 여기기 때문일까?
비슷한 이야기가 어느 책에도 나온다.
그 책엔 죽음을 앞둔 노인과 갓난아이의 공통점을 말한다.
둘 다 걷는 게 힘들다는 것, 대소변을 스스로 가릴 수 없다는 것, 말이 어눌해서 잘 알아듣기 힘들다는 것. 이 둘은 같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이 둘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어떤가? 갓난아이에겐 미소를 지을 수 있지만, 거동이 불편한 노인에겐 미소를 짓는 게 쉽지 않다. 갓난아이는 기꺼이 돌봐줄 마음이 들지만, 노인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젊음은 아름답지만, 늙음은 아름답기보단 추함에 무게 중심이 가 있기에 쉽사리 마음을 움직이기가 어렵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당연히 여기는 시간의 연속성을 벤자민처럼 한 번쯤 거꾸로 생각할 수 있다면 젊음과 늙음은 차이가 없어진다. 시간의 순서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젊음이 미래로, 늙음이 과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면 후회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젊은 시절을 맞이할 수 있겠지.
그러면 젊음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마음도 바뀔 수 있겠지.
삶은 흔히 여정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길을 가는 도중엔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거나 단정 짓진 않는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비로소 그 과정을 돌아보며 잘 왔는지, 옳은 방법이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삶의 여정에서도 미리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그때가 좋았지’ 하며 젊은 시절의 호시절을 떠올린다고 해도 삶이 다하지 않은 한 정말 그때가 좋았는지, 아닌지 확신할 방법이 없다. 혹시 아는가? 그때보다 더 좋은 때가 늙은 시절이 돌아올지?
그러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젊음을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고, 늙은 시절이라 인생을 다 산 것처럼 체념할 필요도 없다.
삶은 시간의 순서대로 가든, 벤자민처럼 거꾸로 가든 그저 시간의 길 위에 있을 뿐이다.
그 길 위에 있는 늙은 시절은 젊은 시절만큼 소중하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살기보다는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젊은 시절이든, 늙은 시절이든 지금 시간을 살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