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어쩌면 신의 배려-
망각 -어쩌면 신의 배려-
  • 김민희 배우
  • 승인 2023.03.20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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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리는 것은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능력이며, 벌어진 모든 일을 기억하는 것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

우리가 잘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망각이라는 신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잊지 말아야 하는 것, 잊고 싶지 않은 것들은 절대 기억하고 싶다. 그러나 너무나 잊고 싶은 기억들은 없었던 일인 듯 망각해 버리고 싶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 한다면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만큼 꽤나 힘든 삶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적당히 잊으며 살아가는 게 어느날 엔가의 아픈 나를 놓아주는 치료약이 된다.

꼭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는 일이 있듯이, 꼭 잊어내야만 하는 일도 있다. 자연스럽게 잊혀진다면 고맙겠지만, 잊으려 노력해도 때로는 그것이 쉽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서 잊어내야 하는 일에는 어느 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니체는 망각을 축복이라 여겼다. 어떤 아픔이나 고통을 잊게 만들어 준다면 축복처럼 여겨질 법도 하다. 하지만 잊는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소중한 무엇을 잊는 것, 내가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기억하려 애쓰고, 잊혀지지 않으려 애쓴다. 그렇게 애를 쓰며 살면서, 동시에 어떤 것들은 잊으려 또 애를 쓰며 살아간다. 우리는 참 너무나도 애쓴다.

"아픈 기억을 지워드려요.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구겨진 마음의 주름을 다려줄 수도, 얼룩을 빼줄 수도 있어요. 모든 얼룩을 지워 드립니다. 오세요, 마음 세탁소로."

"어떤 아픈 기억은 지워져야만 살 수 있기도 하고, 어떤 기억은 아프지만 그 불행을 이겨내는 힘으로 살기도 하지. 슬픔이 때론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해."
 -윤정은의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중-

살아가는 힘이 될 정도의 슬픔은 남겨 놓고, 지워져야만 하는 아픈 기억만 선별해서 싹 지워 준다면 그야말로 땡큐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땡큐일 때가 많지는 않다. 슬프지만 그게 인생이다. 
결국 우리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애쓰며 살 수밖에 없다.
잊지 않으려는, 그리고 잊어 내려고 애를 쓰며 '망각'은 축복이자 신의 배려임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

"나의 인생이 불행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신과 행복했던 기억부터 불행했던 기억까지, 그 모든 기억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였습니다.
그 기억이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무섭기만 합니다.
당신이 죽었던 날보다도, 지금이... 당신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 무섭습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 중에서-

치매에 걸린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이렇게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기억이 사라져 가는일 일 것이다. 그들에게 망각은 신의 배려가 아닌 신의 형벌과도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소중한 기억만큼은 망각의 늪에 빠뜨리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소중한 누군가에게 잊혀지는 일 또한 가슴 아픈 일이다. 그래도 비워내고 잊으며 살아가는 것이, 다시 채우고 내일을 살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내가 잊어버린 소중한 기억이든, 누군가에게 잊혀져 버린 망각의 대상이 되었든 사실은 다 괜찮다. 그런 가슴 아픈 상황도 언젠가는 또다시 망각이라는 신의 배려가 나를 도울 것이다. 적당한 시간과 나의 '애씀'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회복하고 또 잘 살아갈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김민희 배우 calnews@naver

배우 김민희

만 6세인 1982년 KBS 성탄특집극 《집으로 가는 길》에 출연하면서 배우의 길에 들어선 아역스타 출신이다. MBC베스트극장에서 다수의 주인공 역을 시작으로 SBS 대하드라마 《여인천하》, MBC 주말연속극 《여우와 솜사탕》, 등을 통해 안방극장에서 꾸준히 활동해 왔다. 특히 1997년 MBC 일일연속극 《방울이》에서 주인공인 방울이 역을 맡아 많은 사랑을 받은 연기파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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